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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사려 깊은 번역가의 말 걸기] 민요 부르기와 번역의 공통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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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5-05-13 14:27 조회 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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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요 부르기와 번역의 공통점은?

알 듯 말 듯 민요의 세계


신수진 어린이책 번역가



3월부터 민요를 배우고 있다. 5년 동안 쉬지 않고 대학원을 다녔더니 책으로 하는 공부 말고 다른 걸 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참이었다. 코인 노래방조차 한 번을 안 갔더니 내 몸에 ‘흥’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것 같아서, 어디 그 ‘흥’이란 거, 돈 주고 배워서라도 한번 불어넣어 보자 하는 엉뚱한 오기도 발동했다. 가까운 제주 시민교육 기관에서 민요 교실을 운영한다는 정보를 얻어서 얼씨구나 하고 등록을 했고, 수강생들 가운데 내가 가장 막내여서 얼떨결에 총무까지 맡게 되었다. 알고 보니 총무는 수업 조교 같은 거여서, 결석 같은 건 꿈도 못 꾸게 됐다. 학교에 또 입학한 것 같은 이 기분…



즐겁게 불러야 하는가, 서글프게 불러야 하는가

춤을 배우러 다니거나 운동을 할 수도 있는데 왜 하필 민요인가. 사실 인생의 어느 순간부터 민요 가사가 가슴에 사무치기 시작했다는 것이 민요를 배우게 된 가장 강력한 동기인지도 모르겠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하는 판소리 단가 <사철가>를 들으면 인생 황혼기에 선 사람처럼 쓸쓸해진다. 그러다가 제주민요 <용천검>을 들으면 “명년 이월 춘삼월 나면 다시 피는 꽃이로구나. 에헤야라 데야 에헤야라 데헤야라 방애 방애로다.” 하는 대목에서 새로운 시간과 도전이 몇 번이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안도감이 피어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민요 가사는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채록된 버전도 여러 가지이고 부르는 방법도 가지가지여서, 스승님을 따라 노래를 불러 보면서 그 정서를 몸으로 느끼고 익혀 내 식대로 해석하는 수밖에 없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하나하나 파헤쳐 가면서 공부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지만, 민요는 그런 식으로 배우자면 한 글자도 노래할 수가 없다. 제주민요 <오돌또기>는 무슨 뜻인가. “둥그대당실 둥그대당실”이라는 후렴구는 또 무슨 뜻인가. <이어도사나>는 즐겁게 불러야 하는가 서글프게 불러야 하는가. 궁금증은 끝이 없다. 소리를 탁 내뱉고 물결치듯이 꺾어 가며 부르는 민요의 창법은 경쾌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막막하고 슬프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나의 노래 안에서도 희로애락을 넘나드는 갖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치는데, 기나긴 세월과 수많은 사람의 역사가 노래에 켜켜이 쌓인 채로 지금의 후손에게 전해지는 과정이 민요를 배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대 한국어로 일대일 대응이 되지 않는 말들이 넘실대는 가운데서 나만의 해석을 찾아가는 것이 민요 공부가 아닐까




노래’를 하지만‘ 번역’을 하는 기분

번역을 하면서 나로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나 감정까지도 우리

말로 옮겨야 하는 경우가 정말 셀 수 없이 많다. 수많은 자료를 읽고, 텍스

트뿐 아니라 영상까지 검색하면서 비슷한 경험에 도달해 보려고 애를 쓰지

만 결국은 내 상상력과 표현력의 한계 안에서 결과물이 나오는 법이다. 그

래서 번역이라는 행위는 늘 나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는 두려운 일인 동시

에 나만이 해낼 수 있는 한끗의 짜릿한 재미를 만끽하는 일이기도 하다.

민요 교실에서는 노래를 웬만큼 익히고 나면 각자 돌아가면서 한 소절씩

부른다. 그런데 똑같은 가사라도 누구의 몸을 통과해 나오는 소리냐에 따

라 그 느낌이 놀라울 정도로 다르다. 노래를 하고 있지만 꼭 여럿의 번역

결과물을 비교하는 것만 같아서 혼자 큭큭 대며 재미있어 하곤 한다(그렇

게 즐기다 보니 나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얼쑤!” “조오타!” “잘한다!” 하고 추임

새를 넣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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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민요 악보집』

제주민요보존회 지음│한그루│

2020

같은 초심자라 해도, 제주어에 능숙하고 제주의 들판과 바다에서 노동으로 잔뼈가 굵은 70대 여성들이 부르는 제주민요는 내가 부르는 것과는 그 맛이 한참 다르다. 배우지 않아도 자기만의 멋을 낼 줄 아는 어르신들의 경지를 어떻게 따라잡거나 흉내 낼까 싶다가도, 나는 또 나만의 경쾌한 맛을 낼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을 고쳐먹으면서 열심히 목을 풀어 본다.



팝송과 다른 상상력으로 부르는 장르

노래는 목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일이라는 것도 새삼 배웠다. 뱃속에서부터 끌어올리는 소리, 목으로 넘어와서 귀 뒤로 휙 넘기는 소리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하고, 손끝 발끝 그리고 표정에도 감정을 담아 노래 부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직은 몸도 뻣뻣하고, 박자도 잘 못 맞추고, 어디서 숨을 쉬어야 할지도 잘 몰라서 헉헉대면서 부르는 처지지만, 2시간 내내 목청껏 민요를 부르고 나면 내가 알지 못했던 미지의 시공간으로 잠시나마 다녀온 느낌이 든다. 그건 막연히 영국이나 미국의 문화를 동경하며 영어책을 읽고 팝송을 따라 부르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상상력이다. 이렇게 민요를 배우면서 ‘과거의 언어와 정서’라는 또 한 가지 언어와 문화를 몸으로 익혀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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