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새책 깊게 읽기 - 동화에 대한 예의, 그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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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11 11:31 조회 6,552회 댓글 0건본문
한 해의 마지막 달이 되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마지막에는 뒤를 돌아보게 된다. 올해 어린이 문학 신간을 고르면서, 특히 우리 동화를 고르면서 참 답답한 물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우리나라 동화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아이들이 주인공이라고, 아이들이 읽을 만큼 쉽게 썼다고 동화라고 말을 하는 많은 글들에서는 철학도 세계관도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어른의 입장에서 처음 동화라는 문학 장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십여 년 전이다. 1990년대 우리 동화
는 어른이 읽어도 충분히 공감하고 감동받을 만큼 따뜻하고 안정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동화를 읽어도 시대를 관통하는 철학을 읽어낼 수 있었고, 그 철학을 바탕으로 인간을 위로하는 이야기를 만드는 문학 본연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해냈다. 그 시대가 그럴 수 있었던 것에는 그 시대의 ‘중심’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빛나는 작가로서의 권정생 선생님, 타협을 전혀 바랄 수 없었던 추상같은 비평의 이오덕 선생님, 답답할 만큼 원칙을 고수하던 ‘어린이도서연구회’ 같은 시민운동단체, 이런 사람과 단체들이 그 중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중심이 잡히면 방향이 설정되고, 방향이 설정되면 그 분야는 발전한다. 그 시대 어린이 문학은 그렇게 발전해서 지금 우리에게 이 시대 어린이 문학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다면, 지금 21세기 어린이 문학은 발전하고 있는가. 단언컨대 근래 어린이 문학은 방향을 잃었다. 동화 출판 종수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동화들은 ‘과연 이것이 동화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게 한다. 왜 썼는지, 누구를 위해 썼는지가 불분명한 작품들이 대부분인 올해 동화의 경향을 보면서 이렇게 방향을 잃게 된 이유를 한번쯤 짚어보아야 한다.
근래 어린이 문학계에는 중심도 리더도 없다. 작품을 발표하는 현존 작가 중에 전체 분위기를 이끌어갈 대표 작가가 누구다 할 사람이 없다. 추상같은 비평을 해주는 비평가도 없다. 독자의 입장에서 꼼꼼하게 거르며 모니터 해줄 시민운동단체도 없다. 어린이 문학을 움직이는 단 하나의 동력은 ‘시장논리’다. 작가들도 출판사도 그에 충실할 뿐이다. 동화는 그렇게 더 자극적이고 화려하고 천박하게 변하고 있다. 그게 지금 어린이 문학의 현실이다. 동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이런 현실은 눈물이 날 만큼 안타깝다. 이런 시기에 다시 손에 들게 된 이오덕 선생님의 책은 우리 동화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힘을 준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이미 발표된 것들도 있고, 언제 쓰신 것인지 따로 밝히지 않아 쓰신 날짜를 알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읽어보면 이미 발표된 다른 글들과 겹쳐 생각나는 것들도 많다. 그런 중에도 제1장 「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는 간략하고 명확한 어조로 우리에게 동화의 기준을 알려준다. 이 글은 어린이들과 가까이 생활하는 교사들에게 동화 한번 써보라고 넌지시 권하는 간략한 형태의 글이다. 동화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부터 동화의 주제, 글감, 문장 형태, 이야기 전개 과정들을 쉽게 설명하고 있는데, 지금처럼 ‘과연 이것을 동화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작품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드는 시대에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기본 잣대로 삼기에 충분한 글이다.
이 책에서는 동화는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어린이들이 알 수 있는 이야기로 쓰는 글’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말을 조금 더 풀어 이렇게 설명한다. “흔히 아동문학을 동심의 문학이라고 한다. 동심은 우리가 찾아가야 할 착함과 아름다움의 세계다. 아동문학은 이런 동심의 세계를 그리는 문학이다. 좀 더 뚜렷하게 말하면 1 동심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2 동심이 어떻게 해서 짓밟히고 비뚤어져 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며, 3 동심을 끝까지 지켜 나가는 어린이와 어른들의 삶을 그려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지켜 동화를 쓰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다시 한 번 이렇게 당부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역시 아동문학은 어렵구나 하고 탄식하는 사람이 나올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이 정도의 견해와 각오는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어린이 문학 작가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을 하신다. “우리의 아동문학은 대체로 어린이의 것이 못되고 있다. 이것은 많은 작가들이 아동문학을 개인의 오락처럼 여기고 있기 때문이고 어린이를 팔면서 사실은 어른들이 읽는 문학의 흉내나 내려고 애쓰는 까닭이다.”
근래 나오는 동화들은 어린이들에 대한 예의가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어떻게 느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동화에 대한 예의도 없다. 그것이 문학이 되든지 말든지 상관이 없다. 경제 논리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해도 인간이 문학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어린이들에게 제대로 된 동화를 포기하게 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 지금, 방향을 잃은 어린이 문학은 ‘이오덕’이라는 단호하고 명징한 잣대를 그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아프고 힘들지라도, 명예로 작가를 하는 것이 아니고 돈벌이만으로 동화책을 내는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그 기준을 받아들여 아파하고 치유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