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새책 깊게 읽기 - 옛이야기의 ‘원형’과 ‘변용’, 그 나아갈 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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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11 17:11 조회 11,090회 댓글 0건본문
한국의 다양한 문학에서 원천 소스를 발굴하여 그림책으로의 각색을 시도해 온 작가 이영경이 참신한 기획의 그림책을 선보였다. 『콩숙이와 팥숙이』는 민담 ‘콩쥐팥쥐’를 원형으로 삼아 1950년대를 배경으로 각색한 그림책인데, 작가는 이미 『넉 점 반』을 통해 60년대의 생활사를 재현해 본 경험이 있다는 측면에서 이번 기획은 이영경의 그림책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영경은 ‘작가의 말’에서 이 작품이 콩쥐팥쥐 이야기를 씨실로 삼고, 한국전쟁 직후의 시절을 날실로 삼아 만든 그림책이라고 소개하며, 취재와 수집 작업의 과정을 덧붙이고 있다. 민담의 확장을 시도한 작가의 의미 있는 노력을 충분히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불편한 사실을 밝힘으로써 『콩숙이와 팥숙이』와 관련한 생산적 담론이 더욱 융성하기를 희망한다.
우선 ‘50년대의 생활상 보여주기는 성공적이었는가’의 문제이다. 『넉 점 반』은 동시라는 장르의 특성상 60년대 풍경이 무리 없이 녹아들 수 있었지만 강력한 서사성을 가진 민담을 각색한 경우는 무리가 따를 수 있다. 이 그림책에서 50년대라는 시대성을 건져 올리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림을 통해 한국전쟁의 흔적이 드러나야 하며, 그것은 서사와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어야 했다. 또한 전쟁은 보편적으로 어미 없는 자식이 아닌 아비 없는 자식을 낳게 마련이며, ‘아비 상실’ 모티브는 우리 분단문학사의 한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이는 50년대와 『콩숙이와 팥숙이』를 엮을 명분이 약하다는 뜻이다. 서사와 상관없는 소재의 피상적 나열이라면 지식·정보 그림책을 통한 보여주기가 더 효과적이었을 듯싶다.
이와의 연장선에서 ‘민담 콩쥐팥쥐와 50년대 서울의 결합은 타당한가’의 문제이다. 봉건적 질서가 지배하는 근대 이전의 농경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콩쥐팥쥐’에서 밭매기과 물긷기, 검은 소와 두꺼비 등의 등장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림책에서는 이러한 소재가 전봇대와 밀집한 판자촌, 시발자동차와 전차 등의 근대적 소재와 함께 등장함으로써 배경의 충돌이 일어난다. 마지막 화면에서 ‘도시는 다시 평화와 즐거움이 가득했어요’라는 글과 함께 시장이 한복을 입고 누렁소를 비질하는 모습이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충돌과 모순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각색된 옛이야기가 근본적으로 담보해야 할 가치’의 문제이다. 우리의 민담은 보편적으로 가난하거나 어리거나 여성, 바보 등으로 표상되는 ‘약자의 강자에 대한 승리’와 ‘악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공통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점에서 콩숙이의 과장된 선함과 계모에 대한 응징이 빠진 것은 아쉬운 점이다. 콩숙이가 뒷간 구멍에서 얻은 먹을거리를 먹었다는 이야기는 생략된 채 배고픈 아이들에게 그것들을 나누어 주었다는 화소話素는 착한 아이로 훈육하겠다는 어른들의 욕심으로 인해 생긴 전래동화 특유의 화소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임석재전집』, 『한국구비문학대계』 등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화소이다. 그리고 계모는 팥쥐와 함께 어떤 식으로든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 민담의 정신세계와 부합한다.
또한 1970~80년대에 집중 채록된 ‘콩쥐팥쥐’ 유화類話 및 17세기경부터 국문필사되어 온 「콩쥐팥쥐전」을 종합하여 재구성할 때 ‘화소 변형의 범주’를 설정하는 문제이다. 팥숙이가 뒷간 구멍에 손을 집어넣었는데 똥이 나오고, 불똥벌레 떼가 날뛰고, 온 마을에 불난리가 났다는 화소는 새롭게 창조된 화소인데 그 적절성에 의문이 든다. 민담에 등장하는 검은 소·암소는 보편적으로 콩쥐 어머니의 화신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그리하여 뱃속에 든 먹을 것을 콩쥐에게 주는 상징적 화소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뒷간 구멍에서 먹을 것을 꺼낸다는 어색한 화소가 덧붙여진 것은 공중변소를 보여주기 위함인데, 소재의 무리한 사용이 이야기 전개에 걸림돌이 되어버린 형국이다.
같은 맥락에서 “껌 하나 주면 좋은 일 있을 걸.”이라는 대사 역시 어머니로 상징되는 소가 딸에게 조건을 걸고 도와준다는 점에서 어색한 설정이다. 역시 껌을 등장시키기 위해 창조된 화소이다. 이 외에 암소·검은 소가 아닌 ‘머리 검은 소’의 등장, ‘가는 길’이 아닌 ‘오는 길’에 신을 잃어버리는 화소 등은 원형을 찾아볼 수 없는데, 모든 유화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화소를 변용시켜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창작물이 아닌 경우 변형의 경계를 설정하는 부분은 앞으로 많은 논의가 필요한 힘든 부분이다. 덧붙여 고증에 실수가 있었다. 소가 콩숙이에게 선사한 먹을거리 그림에 등장하는 삼양라면은 60년대 후반 즈음 생산된 것이다.
옛이야기와 창작물의 경계에 있는 『콩숙이와 팥숙이』가 ‘콩쥐팥쥐’를 패러디한 온전한 창작 그림책으로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한정된 지면으로 인해 이 책이 지닌 여러 미덕을 짚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송구한 마음이 든다.
우선 ‘50년대의 생활상 보여주기는 성공적이었는가’의 문제이다. 『넉 점 반』은 동시라는 장르의 특성상 60년대 풍경이 무리 없이 녹아들 수 있었지만 강력한 서사성을 가진 민담을 각색한 경우는 무리가 따를 수 있다. 이 그림책에서 50년대라는 시대성을 건져 올리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림을 통해 한국전쟁의 흔적이 드러나야 하며, 그것은 서사와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어야 했다. 또한 전쟁은 보편적으로 어미 없는 자식이 아닌 아비 없는 자식을 낳게 마련이며, ‘아비 상실’ 모티브는 우리 분단문학사의 한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이는 50년대와 『콩숙이와 팥숙이』를 엮을 명분이 약하다는 뜻이다. 서사와 상관없는 소재의 피상적 나열이라면 지식·정보 그림책을 통한 보여주기가 더 효과적이었을 듯싶다.
이와의 연장선에서 ‘민담 콩쥐팥쥐와 50년대 서울의 결합은 타당한가’의 문제이다. 봉건적 질서가 지배하는 근대 이전의 농경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콩쥐팥쥐’에서 밭매기과 물긷기, 검은 소와 두꺼비 등의 등장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림책에서는 이러한 소재가 전봇대와 밀집한 판자촌, 시발자동차와 전차 등의 근대적 소재와 함께 등장함으로써 배경의 충돌이 일어난다. 마지막 화면에서 ‘도시는 다시 평화와 즐거움이 가득했어요’라는 글과 함께 시장이 한복을 입고 누렁소를 비질하는 모습이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충돌과 모순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각색된 옛이야기가 근본적으로 담보해야 할 가치’의 문제이다. 우리의 민담은 보편적으로 가난하거나 어리거나 여성, 바보 등으로 표상되는 ‘약자의 강자에 대한 승리’와 ‘악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공통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점에서 콩숙이의 과장된 선함과 계모에 대한 응징이 빠진 것은 아쉬운 점이다. 콩숙이가 뒷간 구멍에서 얻은 먹을거리를 먹었다는 이야기는 생략된 채 배고픈 아이들에게 그것들을 나누어 주었다는 화소話素는 착한 아이로 훈육하겠다는 어른들의 욕심으로 인해 생긴 전래동화 특유의 화소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임석재전집』, 『한국구비문학대계』 등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화소이다. 그리고 계모는 팥쥐와 함께 어떤 식으로든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 민담의 정신세계와 부합한다.
또한 1970~80년대에 집중 채록된 ‘콩쥐팥쥐’ 유화類話 및 17세기경부터 국문필사되어 온 「콩쥐팥쥐전」을 종합하여 재구성할 때 ‘화소 변형의 범주’를 설정하는 문제이다. 팥숙이가 뒷간 구멍에 손을 집어넣었는데 똥이 나오고, 불똥벌레 떼가 날뛰고, 온 마을에 불난리가 났다는 화소는 새롭게 창조된 화소인데 그 적절성에 의문이 든다. 민담에 등장하는 검은 소·암소는 보편적으로 콩쥐 어머니의 화신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그리하여 뱃속에 든 먹을 것을 콩쥐에게 주는 상징적 화소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뒷간 구멍에서 먹을 것을 꺼낸다는 어색한 화소가 덧붙여진 것은 공중변소를 보여주기 위함인데, 소재의 무리한 사용이 이야기 전개에 걸림돌이 되어버린 형국이다.
같은 맥락에서 “껌 하나 주면 좋은 일 있을 걸.”이라는 대사 역시 어머니로 상징되는 소가 딸에게 조건을 걸고 도와준다는 점에서 어색한 설정이다. 역시 껌을 등장시키기 위해 창조된 화소이다. 이 외에 암소·검은 소가 아닌 ‘머리 검은 소’의 등장, ‘가는 길’이 아닌 ‘오는 길’에 신을 잃어버리는 화소 등은 원형을 찾아볼 수 없는데, 모든 유화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화소를 변용시켜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창작물이 아닌 경우 변형의 경계를 설정하는 부분은 앞으로 많은 논의가 필요한 힘든 부분이다. 덧붙여 고증에 실수가 있었다. 소가 콩숙이에게 선사한 먹을거리 그림에 등장하는 삼양라면은 60년대 후반 즈음 생산된 것이다.
옛이야기와 창작물의 경계에 있는 『콩숙이와 팥숙이』가 ‘콩쥐팥쥐’를 패러디한 온전한 창작 그림책으로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한정된 지면으로 인해 이 책이 지닌 여러 미덕을 짚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송구한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