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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가리킴’에 가려진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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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12 17:25 조회 10,90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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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화의 선생님 대접
우리 동화의 선생님 대접은 요즘 사람들이 학교 선생님을 바라보는 시선과 닮은 구석이 있다. 사람들이 선생님을 보는 시선은 어떠한가. 마음 깊이 신뢰하지 못하면서 아이를 맡겨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 기능만을 인정하고 있진 않은가.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그들을 변화시킨다는 직업적 소명은 아이와 학부모, 선생님 자신에게도 무색해졌다.

우리 동화 속 선생님의 모습을 살피기 위해 이곳저곳을 뒤져본 결과도 그렇다. 학교 선생님이 등장하는 우리 동화는 손가락을 꼽을 만큼 적을뿐더러 작품 안에서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 또한 미미하기 짝이 없다. 아이들 주변을 묘사하자니 어쩔 수 없이 동화속에 들어간 꼴이다.

선생님이 나타난 동화들 중 하나를 잠깐 살펴보자. 채인선의 동화 『내 짝꿍 최영대』에서, ‘굼벵이 바보’라고 같은 반 영대를 놀리며 왕따시킨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그동안 참고 있었다는 듯 앉았다 일어나 벌을 반복시킨다. 그런데 선생님은 자기가 주는 벌로 영대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이미 영대의 갑작스런 울음소리 때문에 영대를 이전의 ‘찌질이’가 아닌 다른 존재로 보고 있다. 선생님이 주는 벌은 단지 그동안 영대를 괴롭힌 아이들에 대한 화풀이 정도로 비쳐질 뿐 이야기의 흐름을 좌우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지 못한다. 학교 선생님이 등장하는 다른 동화들*도 대개가 이런 식이다.

그렇다면, 우리 동화에서 선생님은 왜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것일까? 만약, 선생님이 그 직업적 소명에 걸맞게 아이의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면 우리 동화가 이토록 학교 선생님을 푸대접할 이유가 없는 게 아닐까.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지 못하거나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에 동화에서조차 주변인물로 물러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꿈틀거리는 생동감으로 어린 영혼에 다가가고 가르치기보다는 지시하고 판단하는, 그렇고 그런 단조로운 사무 처리와 같은 ‘가리키는 일’로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기에 보통 사람들보다 민감한 작가들조차 선생님이란 인물에 대해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가정이 보편적인 것인지는 좀 더 많은 동화를 살펴본 후에 판단해도 늦지 않으리라. 이에, 시대적 배경이 각기 다른 세 편의 동화 속 선생님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1927년 3월 <어린이> 잡지에 실린 「만년샤쓰」, 2009년에 출간되었으나 40대 작가가 자신의 유년 시절을 소재로 썼다고 밝힌 『욕 시험』, 1999년 출간되었음에도 요즘 선생님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녹아든 『나쁜 어린이 표』가 그것이다. 이들은 각각 현재 시점에서의 노인, 중년, 어린이의 유년을 그리면서 세대에 따라 달라지는 선생님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거칠게나마 우리 동화 속에 그려진 선생님 상의 역사를 훑
어볼 수 있을 것이다.



* 김옥의 『축구생각』과 「학교에 간 개돌이」, 강무홍의 「선생님은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원유순의 『까막눈 삼디기』,송언의 『마법사 똥맨』, 류호선 『달마시안 선생님』, 임태희
『내 꿈은 토끼』. 이들 작품중에는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처음부터 끝까지 선생님
이야기를 하는 것(『달마시안 선생님』)도 있다. 그러나한 아이가 ‘선생님의 깊은 뜻’을 알아가는
과정을 평면적으로 서술하고 있어 동화로서의 매력은 덜한 편이다.

가르침이 부끄러워지다 | 방정환, 「만년샤쓰」
선생님은 가르치는 사람이다. 학교 선생님은 자신의 지식수준, 사람됨에 관계없이 몰
라도 가르쳐야 하고 나빠도 가르쳐야 한다. 더구나 가르침의 대상이 자기보다 몇 십
년 나이가 적은 아이들이니 그의 지식과 행동거지가 그들 앞에서 완벽하게 비춰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자기보다 더 훌륭한 아이 앞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초라하
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선생님 이야기가 있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만년샤쓰」에는 박물(생물)과 수신(도덕)을 가르치
는 선생님, 체조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나온다. ○○고등보통학교 1년급(현재 중학교
1학년) 창남이네 선생님을 보자. 그는 “이 없는 동물이 무엇인지 아는가?”라고 묻는
것으로 박물 수업을 시작하고, “성냥 한 개피의 불도 한 동리 삼십여 집이 불에 타 버렸
으니 단 성냥, 한 개의 성냥이라도 무섭게 알고 주의해 써야 되는 것이니라.”라고 수신
을 가르친다.

그는 마치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내용들을 자신이 모두 갖추고 있는 듯, 교실의 권
력자로 행세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교과서의 지식을 아이들에게 주입하는 것
으로 본연의 임무를 다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욱이 작품의 배경이 근대 교육의
초기인 일제 강점기라는 것을 감안하면 창남이네 선생님은 당시 전통적인 가치관과
는 단절되고 아이들의 삶의 현장과는 괴리된 지식을 주입하는 영락없는 지식인이었
던 것이다.

그에게 교과서 지식들은 아이들에게 전수해야 할 사회적 가치들의 백과였고, 그
역시 ‘교과서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만난 아이들은 교과서적인 삶의 방식이라는 좁은 테두리에 갇혀 있지 않았다. 그러
보니 교과서 지식을 넘어서는 아이들의 순박한 진실, 삶의 아픔에 맞닥뜨렸을 때는
그는 오히려 가르침을 받는 자, 스스로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선생님이 될 수밖에 없
었던 것이다.

“이 없는 동물은 무엇인가?” 의기양양하게 아이들 앞에서 물으며 선생님은 거북,
타조와 같은 대답을 기대했으리라. 그런데 주인공 창남이의, “이 없는 동물은 늙은 영
감입니다.”라는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반 아이들은 깔깔대고 웃고 선생님은 머쓱
해진다.




아이들에게 강인함을 길러주기 위해 추운 날 아이들의 웃통을 벗게 한, ‘군인 출신
의 용서성 없는’ 체조 선생도 그렇다. “만년샤쓰도 좋습니까?”라며 맨몸을 보이는 창
남이를 후려갈길 듯 그의 앞까지 걸어왔으나 속옷 하나 제대로 못 입는 창남이의 가난
앞에서 그만 무섭던 눈에 눈물이 돌고 만다. 창남이가 사는 동네에 불이 나 당장 입을
게 없는 노인에게 옷을 나눠주고 맨가슴에 양복저고리, 아래는 다 뚫어진 조선바지,
맨발에 짚신의 몰골을 하고 나타난 창남이를 보고 이것저것 캐묻던 선생님은 창남이
가 단 하나뿐인 샤쓰마저 앞 못 보는 어머니께 벗어주고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그
만 할 말을 잃는다.

체조 선생은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복장을 요구했고, 추운 겨울날을 이겨나갈 강
인한 정신력을 길러주려 했다. 그러나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체조 시간의 복장과 학
생으로서의 강인함이라는 것이, 가난한 삶의 한복판을 해학과 순전한 인간미로 뚫고
나가는 창남이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하고 피상적인 것으로 느껴졌을까. 자신이 선생
노릇을 하고 있을지언정 마음을 감복시키는 창남이의 사람됨과 그의 현실 앞에서 뻣
뻣하기 그지없는 체조 선생은 굵다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만다.





가르침을 고뇌하다 | 박선미, 『욕시험』
선생이라는 직함만으로 ‘가르침’을 보장할 수 없음을 아는 선생님에게, 그럼에도 가
르쳐야만 한다는 것은 얼마나 곤욕스러운 일일까?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이 곤욕
스러움은 특별히 민감한 영혼에게 일어나는 일인 듯, 그런 곤욕 때문에 선생 노릇을
하지 못하는 선생님은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다.

동화에서건 현실에서건, 선생님은 교육을 둘러싼 이상적인 공염불 같은 ‘가르침’
보다는 아이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가리킴’에 훨씬 익숙한 모습이다. 한 영혼을 사
랑으로 깨운다는 소명은 학교 입구 돌판 위에나 새겨져 있는 듯, 선생님은 아이들의
영혼은커녕 한 육체를 통제하는 일만으로도 지쳐 보인다. 고함을 지르고 손가락질을
해대도 통통 튀는 아이들을 어찌 하기 힘들기에 날로 능숙해지는 것은 아이를 다루는
기술인 것이다.

한 영혼을 깨우는 일과 한 육체를 다루는 일,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가르침이란 이
둘 사이의 깊은 골을 건너갈 다리를 놓는 일쯤이 아닐까. 동화 『욕 시험』은 어느 초등
학교 선생님이 놓은 그 멋진 다리를 보여준다.

『욕 시험』의 주인공 야야네 반 아이들은 어느 날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앞뒤에 문
제라고는 하나도 적혀 있지 않은 시험지를 받는다. 선생님은 대뜸, “너거들, 어데 하
고 싶은 욕 있으면 이게다가 다 적어 봐라.”라고 한다. 시험이란 그 사회가 학교를 통해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들을 가르치고 문제를 통해 그 습득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
다. 사회는 학교를 만들고 학교는 시험을 만들어 아이들이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노
력하도록 강제함으로서 결국 사회적인 기능을 수행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욕 시험이라니. 더구나 선생님이 학교에서 욕 시험을 본다는 것은 욕이란 것
을 학교가 꼭 가르쳐야 하는,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쏙쏙 받
아들이고 달달 외워서 써야 하는 시험지 대신 욕을 하라고 내준 시험지 앞에서 아이들
이 쩔쩔매는 것을 보면 야야네 선생님이 얼마나 파격적인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빵점을 맞을 수는 없어서 주인공 야야는 욕을 쓰기 시작한다. 이상한 것은, 욕 한 마
디 못하던 야야의 입에서 시험지 앞뒤를 빼곡히 채우는 욕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욕은 멈추지 않고 쏟아져 그동안 가슴 속에 쌓였던 일들을 새록새록 떠오르게 하고 마
음을 뒤흔들어 야야로 하여금 열병을 앓게 한다.



야야네 아빠도 야야 담임선생님처럼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이다. ‘선생 딸
내미’였기에 야야는 친구들로부터 억지소리를 듣거나 억울한 일이 있어도 그저 당하
고만 있었다. 선생님은 어때야 되기 때문에 그의 딸도 마땅히 그 이름에 똥칠을 하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주위의 암묵적인 요구에 이제껏 야야는 길들여져 온 것이다. 하
지만 참으로 이상한 일은 그런 야야가 욕 시험을 치룬 후, 자신도 욕을 할 수 있는 사람
임을 알았고, 나아가 얼토당토 않는 것에 욕 한번 시원하게 하지 못하며 스스로를 얼
마나 옥죄고 있었던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야야네 선생님의 ‘욕 시험’은 사회의 편에서 보자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이미
정해놓은 가치를 전수하는 데 애써야 할 교사가 오히려 그 가치에 맞지 않는 일을 하
고 있다니 말이다. 야야네 선생님은 허울 좋은 사회적 강요로부터 위선과 가식에 익
숙해지며 파괴되어 가는 아이를 보았고, 그 사회가 마련한 시험이라는 제도를 역이용
하여 야야로 하여금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히 대면하는 기쁨을 맛보게 해주었다. 강요
되는 가치에 파괴되는 인간성을 단지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도 안에서
해결하기 위해 고뇌한 것이다.



가르침이 전도되다 | 황선미,『나쁜어린이표』
야야네 반 선생님이 야야의 드러나지 않는 감정의 응어리를 보고 그것의 해소를 궁리
했다면 또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 건우네 반 선생님은 그와 정확한 대척점에 서 있다.
『나쁜 어린이 표』의 선생님은 아이들의 드러난 행동만을 보고 그것의 처치를 위해 가
장 손쉬운 방법을 사용한다.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을 볼 때마다 그 행동을 못하게 하
기 위해 ‘나쁜 어린이 표’를 내미는 것이다.

건우네 반 선생님에게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고, 아이가 위선이든 가
식이든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착한 어린이 표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단지 선생님의 편의를 위한 장치이기에, 그것을 받는 아이의
‘나쁨’과 ‘착함’을 나타내주지 못한다. 실제 의미를 담고 있지 못하면서 오로지 보이
는 행동에 따라 남발되는 ‘공수표’인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동화 속 선생님의 말을 통
해서도 확인되는 바, 나쁜 어린이 표를 몰래 가져다가 몽땅 변기통에 버린 건우에게
선생님은 “네가 나쁜 어린이 표 다 가져간 거랑 내가 너한테 받은 거, 우리끼리 비밀로
하자. 네 덕분에 애들을 가르치기가 더 힘들겠구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름의 진실한 내용을 갖지 못하면서 선생님이 단지 편하게 가르치기 위해 사
용한 나쁜 어린이 표는 선생님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것인지 모르나 그것을 받은 아이
에게는 심각한 변화가 일어난다. 아이들은 단지, ‘재수 없게’ 자기도 나쁜 어린이 표를
받을까봐 나쁜 어린이 표를 받은 아이와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어떤 짓을 해도 나쁜
어린이 표만 받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보이기 위한 행동을 궁리한다. 아이들이
이런 행동을 많이 할수록 아이들 마음은 억울함과 억눌림으로 응어리지는 것이다.

건우네 반 선생님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아이들로 하여금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학교생활을 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영혼을 깨우는 일’이기보다는,
‘한 육체를 다루는 것’이 주요 관심사인 것이다. 그렇다면 건우네 반 선생님은 왜 아이
들을 이렇게 가르치고 있을까? 건우네 반 선생님에게는 건우가 없다. 선생님에게 중
요한 것은 학교라는 시스템 안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과 학급 관리, 질서 유지와 행동
통제, 시험에서 일정 수준의 득점 따위이지 건우라는 한 개인이 아니다. 아이들은 하
나의 움직이는 육체이고 선생님은 그 육체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통제해야 한다.

이것이 과연 동화 속, 건우네 반 선생님만의 문제일까. 건우네 반 선생님이 건우를
문제 행동의 여부, 관리 대상의 여부로 판단하는 시선은 그대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선과 일치하고 있진 않은가. 사람을 그 사람이 가진 ‘기능’에 초점에 두고
판단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가르침이란 더 이상 한 영혼을 깨우는 일이 될 수 없다.
육체를 향해 끝없이 지시하는 가르침은 가르침이기를 포기하고 ‘가리킴’이 되어버렸
다. 그것은 아이를 억압하는 것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지도 못
할 뿐더러 오히려 육체를 통해 영혼마저 짓누르는 것이 되어버린다.



영혼깨우기와 육체 다루기
『욕 시험』의 주인공 야야가 학교에서 욕 시험을 치룬 후 억눌려 살았던 자신에 대한 서
러움에 울고 있을 때, 이모가 사춘기를 들먹이는 것을 보면 야야는 5~6학년쯤 된 아
이이다. 건우는 동화책 속 삽화를 통해 3학년으로 제시되었고, 창남이는 지금으로 치
면 중학교 1학년이다. 나이가 어린 순으로 나열하면 건우, 야야, 창남이 이렇게 세워진
다. 건우네 반 선생님은, 강력한 지시가 아니고서는 제 앞가림을 못하는 코흘리개 아
이들의 선생님이었다. 야야네 반 선생님은 한참 어른들 눈치를 보는 아이들의 담임이
고, 창남이네 선생님은 제법 머리가 굵직한 아이들을 맡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보면 건우네 반 선생님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만
눈길을 주지 않으면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리는 아이들에게 한 자라도 가르치려면 ‘나쁜
어린이 표’와 같은 방법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것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
일지라도 한 아이에게 미치는 폐해가 덜해지는 것은 아니다. 나쁜 어린이 표는 그 표를
내미는 선생님 또한 이같은 손쉬운 관리 도구에 점점 의존하게 만든다. 그러한 관리에
익숙해지면서 건우 선생님은 건우를 보지 못하고 문제 행동만 찾아내려 한다. 선생님
은 마음속에 아이가 없는 가르침, 기계적인 반사 같은 가리킴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건우네 선생님 이야기가 3세대 유년 이야기 중에서
손자에 해당하는 시대, 요즈음 학교의 풍경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학교는 점점 경쟁
력 있는 인재를 표방하며 겉으로 드러난 기능에 초점을 맞춰 아이들을 교육하려 한
다. 이러한 의도는 고스란히, 아이들을 관리하는 교실 풍경으로 실현된다. 이런 요즘
의 교실 풍경 속에서, “너거덜 씨부리고 싶은 기 있으면 써 봐라.”라고 한 야야네 선생
님의 말이 그리워지는 것은 그 말이 가진 속 시원한 어감 때문만은 아니다.

욕을 가르친 야야네 선생님은 야야로부터 가장 많은 욕을 얻어먹었다. 야야는 욕
을 쓰게 해 자기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 선생님에게 “빙신 어바리 같은 기.”라고 하며
하루 종일 속으로 욕을 해댄다. 야야네 선생님은 자기가 가르친 아이에게, 자기가 가
르친 것으로 가장 욕을 많이 얻어먹는 ‘빙신 어바리 같은’ 사람이었다. 동화를 통해 만
난 그, ‘빙신 어바리 같은 기’ 단지 이야기 속 인물일 것만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그를
더욱 그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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