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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걸어서 하루! 문학지 도안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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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5 22:11 조회 12,45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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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에게 “우리 어디 갈까?”라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놀이동산이요!”라고 외
친다. 아슬아슬하고 신나는 놀이 기구를 타며 억눌렸던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이
야기다. 그렇다고 아이들 탓만 할 수는 없다. 어른들이 준비한 일정을 따라다녀야 했
던 아이들 속내도 이해해보자. 언제 우리가 아이들에게 주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해준
적이 있던가. 아이들이 기획하고 준비하는 문학답사가 더 상쾌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경험을 함께 느껴보도록 멍석을 깔아보자.

여름이다. 뜨거운 여름 한낮, 세상이 온통 고요하다. 뜨거운 여름 볕 한가운데로 우
리는 문학작품 속 주인공들과 천천히 걸어 들어가려 한다.

서울역부터 걸어서 하루소설가구보씨와 이상을 만나다
서울역 → 남대문시장 → 신세계백화점 → 한국은행 → 청계천 → 전태일 동상(버들다리)
한때 서울의 상징적 지표이기도 했던 서울역 역사驛舍,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이상의 「날개」에 등장하는 서울역(옛 경성역사)은 지금 새 단장 중이다.
이상의 「날개」에서는 경성역 일이등 대합실 티룸를 들러 고독을 누리려 하는 주인
공을 만날 수 있다. 반면 구보씨는 경성역 삼등대합실 군중 속에서 고독을 피하고 싶
었는지 모른다. 그 옛 경성역, 서울역을 나서서 불타버린 숭례문 복원 현장을 천천히
지나 남대문시장으로 들어가보자. 수많은 인생 이야기가 있는 남대문시장에서 착한
세상과 긴 호흡으로 만난 후 신세계백화점으로 가보자. 이상이 다시 날아와 마주한
미쓰꼬시 옥상의 한낮, 당시 일인들의 현란한 소비의 거리를 내려다본다. 이곳이 지
금의 신세계백화점 옥상이다. 지금도 옥상 정원은 휴식공간으로 단장되어 있다. 박완
서의 「나목」에 초상화부 화공으로 등장하는 박수근 화백이 이곳 신세계백화점 본관
에서 일했다고 하고 백화점 건물 자체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본디 모습을 지키고 있으
니 1950년대 분위기와 기운도 한번 찾아봄직하다. 백화점 맞은편 화폐금융박물관으
로 이용되는 한국은행(옛 조선은행) 앞에, 이제 막 구보씨가 전차에서 내려 피로를 달
래려고 천천히 홍차 한잔을 즐기러 걷고 있을 것만 같다. 구보씨가 뜻하지 않은 벗에
게 받은 엽서 한 장의 기쁨을 생각하며 바라본 건너편 명동(본정통) 쪽 서울중앙우체
국(옛 경성우편국)도 지금은 포스트타워로 새로 단장해서 그 웅장함이 좀 낯설다.






박태원의 「천변풍경」을 떠올리며 소공동 을지로 길을 걸어 서울의 한복판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렀던 청계천의 옛길을 찾아가보자. 1930년대 청계천은 조선인 중심의
상업 지역인 종로(북촌)와 일본인 중심의 상업 지역인 본정통(명동), 진고개(충무로,
남촌) 사이에 있어 근대와 전근대가 혼합된 지역이었다. 그래서 근대화되지 못한 주변
지역으로 남아 「천변풍경」의 등장인물들처럼 하루 벌이를걱정하는 빈민들과, 서울
토박이 서민들의 삶과 생활 풍속을 되짚어보게 한다. 이발소 소년 재봉이, 서울로 올라와
남의집살이를 하는 만돌이네 식구, 한약방 주인, 순박한 시골색시 금순이…….

이들이 지금 인위적으로 복원된 청계천을 마주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내친김에 청계천
6가 버들다리(전태일다리)를 찾아 전태일 동상 앞에 서보자. 1970년 11월 13일, 약자들의
지난하고 부당한 가난의 굴레에 저항했던 젊은 청년노동자의 숨결을 느껴보자.

성북동을 걸어서 또 하루 성북동에서 만난 사람들
심우장 → 이태준가(수연산방) → 간송미술관 → 최순우 옛집
성북동에는 근현대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성북동 골목길은 일제강점기를 거
치며 대표적인 빈민 지역으로 자리 잡았던 곳이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
다/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가슴에 금이 갔다/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후략)-김광균, 「성북동 비둘기」
이 시가 상징하듯 성북동은 해방 이후 근대화를 거치면서 도시의 팽창을 압축적
으로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20세기 험난한 역사를 묵묵히 걸어온 어른들의 자취가
유난히 많은 성북동으로 가보자.

서울 지하철 4호선 한성대전철역에서 내려 6번 출구로 나와 2212번, 1111번 버스
를 타고 동방대학 앞에 내리면 왼쪽으로 심우장 표지판이 보인다. 좁은 골목길을 올라
가면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尋牛莊’이 있다. 남향을 좋아하는 일반 한옥과는 달리 북향
집이다.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총독부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 싫어 총독부 건물을 등지
고 북향으로 지었다 한다. 심우장은 시인이자 승려이며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만해
한용운이 1933년에 지어 말년 10여 년을 기거하며 저항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한용운
선생은 1944년 조국의 광복을 앞두고 이 집에서 눈을 감았다. 정갈하고 소박한 집에는
만해의 글씨, 사진, 연구논문집, 옥중 공판 기록 등이 남아있다. 심우장 마당에 모여 건
너편 성북동을 바라보며 「님의 침묵」 등 주옥같은 시편을 낭송해보면 어떨까?

심우장을 나와 골목길을 조금 내려오면 왼쪽에 성북2동사무소가 있다. 그 바로 옆
으로 『문장강화』, 『돌다리』, 『엄마 마중』, 『몰라쟁이 엄마』, 『어린 수문장』으로 어린이
들과도 익숙한 이태준 선생 집이 있다. 지금은 선생의 외증손녀가 ‘수연산방’이라는
찻집을 운영하고 있다. 안채는 불타버렸다지만 누마루까지 갖춘 사랑채가 제 모습을 지키고 있다. 소박한 마
당에 우물도 장독대도 정갈하다. 수필 「성城」에서 이태준 선생은 이렇게 묘사했다.

‘아침마다 안마당에 올라가 칫솔에 치약을 묻혀 들고 돌아서면 으레 눈은 건너편 산마루에 끌리게 된다. 산
마루에는 산봉우리 생긴 대로 울멍줄멍 성벽이 솟기도하고 떨어지기도 하여 있다. 솟은 성벽은 아침이 첫 화살
을 쏘는 과녁으로 성북동의 광명은 이 산상山上의 옛 성벽으로부터 퍼져 내려오는 것이
다. 한참 쳐다보노라면 성벽에 드리운 소나무 그림자도, 성돌 하나하나 사이도 빤히 드
러난다. 내 칫솔은 내 이를 닦다가 성돌 틈을 닦다가 하는 착각에 더러 놀란다.’(후략)
그 마당에 서서 북악을 두른 서울 성곽을 바라보며 선생인 양 이를 닦는 시늉을 내
본다. 마루에 걸려 있는 단란한 가족사진 속의 선생은 유난히 눈빛이 깊고 따뜻하다.
그 깊은 눈빛에 『엄마 마중』, 『어린 수문장』처럼 우리들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힘이 있
나보다. 마당 우물가엔 붉은 빛의 백일홍 나무(일명 간지럼나무)가 처연하다.

이태준 선생 집을 나서 조금 지나 오래된 덕수교회와 마포 새우젓 장수의 별장이
었다는 한옥 이재준가를 지나쳐 내려오면 왼쪽 성북초등학교 앞에 우리 문화재 수호
의 수장 간송 전형필 선생의 간송미술관이 있다. 전형필 선생은 1930년대 초, 일제가
전국에 산재한 옛 무덤을 도굴하고 골동가를 뒤져 우리 문화재를 일본으로 빼돌리고
있을 무렵 우리 문화재를 수집·정리하고 지키는 데 젊음과 재산을 바친 사람이다.

나라 잃은 백성들의 절망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시키는 데 우리
문화 전통을 지켜내는 일이 큰 힘이라는 걸 깨달은 간송은 문화재 한 점 지키는 일이
‘왜놈 한 놈 죽이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독립운동임을 일깨웠다. 문화재를 지켜내는
일로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다. 간송미술관은 일 년 중 5월과 10월에 특별전 형태로 보
름씩 두 번만 문을 연다. 전형필 선생의 흔적을 찾아보면 눈만 호사로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더 풍요로워진다.

간송미술관을 나서 한성대입구역 쪽으로 더 내려오면 등촌칼국수 뒤편으로 최순우
옛집이 있다. 혜곡 최순우 선생은 우리에게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로
잘 알려진 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분으로 한국의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을
소중하게 여기고 널리 알리는 일에 평생을 바쳐온 박물관 인이다. 간송 선생과도 교유가
있었던 최순우 선생의 옛집에는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에서 말했듯 우리 것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던 정신이 그대로 녹아있다. ㄱ자 안채와 ㄴ자 바깥채 사이의 안쪽 뜰보다 안채
뒤뜰이 넓고 아름답다.지금은 재단 사무실로 쓰고 있는 폭이 좁은 기다란 -자 공간이 선
생의 서재로 쓰였다는데 참 예쁜 공간이다.





요즘 우리의 역사문화유적과 전통마을, 역사적 인물들이 남긴
삶의 흔적들이 급격한 개발 때문에 훼손되거나 그 자취를 잃어가고 있다. 2002년에
최순우 옛집도 헐릴 위기에 놓였었는데, 시민들이 나서서 민간모금운동으로 집을 사
들였고 1년여 동안 보수공사를 한 끝에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그래서 최순우 옛집은
‘시민 문화유산 1호’가 되었다. 이후에 한국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의 일환으로 문화유
산 보존 기금마련을 위해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라는 비영리 재단법
인이 설립되었다. 우리의 귀중한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을 시민과 공공의 힘으로 함께
지켜낼 수 있도록 발굴 보존을 주도하는 시민환경운동이다. 한국의 문화를 사랑하고
문화유산 보존에 뜻이 있는 국내외의 시민과 기업들의 후원 통로가 되어 우리 문화유
산 보전에 최선을 다할 거라고 하니 시민의식을 키워 나의 작은 힘도 보태보자.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 4시까지 자유롭게 관람이 가능하고 뒤뜰에서 쉬어갈 수도
있다. 간송미술관이 개관하는 시기에는 일요일까지 문을 열고 다채로운 잔치도 연다.
▨ 한국내셔널트러스트 http://www.nationaltrust.or.kr 02)3675-3401

충북영동노근리 문학기행작가와 함께 하는 하루
노근리 쌍굴다리 → 주곡리 포도밭 → 임계리
『노근리, 그 해 여름』(김정희 지음, 사계절)을 함께 읽고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
리 일대로 떠나보자.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25일부터 7월 29일
까지 4박 5일 동안 노근리 일대에서 참전 미군에 의해 수백 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학
살당한 사건이다. 미국정부는 1999년 AP통신(노근리 사건을 취재, 보도한 공로로 퓰
리처상 외에도 여러 권위 있는 탐사보도상을 받음) 보도 직후에 노근리 사건에 대해
진상 조사를 실시했고, 사건 발생 50년이 지난 2001년 1월,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유
감 표명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때문에 노근리 사건은 인권사와 한미관계사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2004년 2월, 노근리 사건 희생자의 명예
회복을 위한 노근리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현재 이 특별법에 근거하여 노근리
사건 현장에는 노근리 평화공원 건립이 추진 중에 있다.

김정희 작가는 노근리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소명의식으로 영동읍에 오
래 머물며 치밀한 취재를 통해 글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많이 아팠다고 한다. 많이 울
었다고 한다. 작가에게 함께 가자고 청해보길 권한다.

『노근리, 그 해 여름』의 묘사는 너무 생생해서 가슴이 아프다. 노근리 쌍굴다리에
서 빗발치는 총탄과 죽음 앞에 두려움에 떨었을 피난민들을 생각하면 가슴 먹먹해진
다. 또 전장의 일선에서 또 다른 죽음의 두려움으로 떨었을 어린 미군 병사들을 생각
해도 전쟁은 잔인한 일이다. 쌍굴다리 총알 자국은 누군가 시멘트를 발라 가렸었나보
다. 총알 자국이 스스로 시멘트를 밀어내고 아픈 상처를 드러낸다. 여기 진실이 있다
고. 쌍굴다리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노근리에서 숨진 이들의 위령비가 있다. 해마
다 7월이면 이곳에서 위령제가 열린다.

영동읍에 가까운 주곡리 포도과수원에 찾아가면 『노근리, 그 해 여름』에서 열세
살 수옥이로 나온 실제 인물 양해숙 할머니를 만날 수 있다. 포도밭 그늘에 아무렇게
나 앉아, 폭격으로 한쪽 눈이 빠져버리고 쌍굴다리 안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이야기,
한쪽 눈으로 평생 숨죽이고 아프게 사신 서러운 세상이야기를 풀어놓으셔서 찾은 이
들을 눈물 나게 한다. 그러나 노근리 일이 세상에 드러나고 그 드러내는 일을 함께 하
면서 이제는 사는 일에 자신감이 생기셨다 한다. 이제는 장에도 훠이훠이 나가고 자
기 눈이 부끄럽지 않단다. 그 당시 일을 전면 부인하는 미국백악관에도 가서 그 아픈
세월을 맘껏 토로하셨다고 한다. 목소리도 우렁우렁하다.

주곡리를 나와서 노근리 사건의 희생자가 가장 많았던 임계리로 가보자. 임계리
마을회관 앞에 이르면 『노근리, 그 해 여름』 속 현수오빠네 집이 폐가가 되어 있다. 마
을 어르신들에게 그해 7월의 이야기를 실제로 들어보아도 좋겠다. 임계리에서 시작
되는 피난길, 7월의 뙤약볕 아래를 걸을 수 있는 만큼 걸어보자. 유난히 자두나무가
많은 임계리 길은 떨어진 자두만 주워 먹어도 푸짐하다. 『노근리, 그 해 여름』도 읽고
노근리 사건을 영화화해서 올해 상영한 <작은 연못>도 찾아보고 가자.





전북임실지역 섬진강가를 걸어보는 하루섬진강, 그 강에게 길을 묻다
진메마을 → 천담마을 → 구담마을 → 싸리재 → 장구목
전주에서 임실 덕치면으로 가는 국도는 숲길이 아름답다. 덕치초등학교를 지나 진메
마을(장산리)에 들어서면 마을 이름처럼 긴 산을 끼고 강이 마을 앞을 흐른다. 섬진강
이다. 마당에는 햇볕이 노랗고,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그 여
자네 집’이 있었을 법한 그 고샅길을 지나 마을 어귀에 정자나무(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다. 보통은 마을 뒤쪽에 있는 정자나무가 이 마을엔 강을 바라보고 마을 입구에 서
있다. 물가에서 노는 아이들을 어른들이 늘 지켜봐주고 마을 일을 의논하는 여론 수
렴 터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돼지 한 마리를 잡아도 한 달은 걸리는 풍성한 논의가 이
뤄졌던 현장이 정자나무 아래였다고 한다.

자신을 키운 9할이 길이라 했던 김용택 시인을 미리 연락해서 만날 수 있다면 좋겠지
만 그러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돌 담장이 정겨운 시인의 정갈한 집을 돌아 마을 어르신
들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전하고, 징검다리가 놓인 강가로 나가 시인의 어린 시절이 들여
다보이는 『정님이』(『옥이야 진메야』를 고쳐서 다시 묶었다)의 따뜻한 등도 만나보자.

천담 가는 길만 남아있을 뿐 시인이 근무하던 천담분교는 이제 없다. 천담마을로
가는 십리 길은 아직 비포장 흙길이다. 시인이 고집스럽게 막아서서 아직 포장이 되
지 않았다는 그 길 초입에 김용택 시인의 시 「천담 가는 길」을 적어 세워 놓았다.

‘세월이 가면/길가에 피어나는 꽃 따라/나도 피어나고/바람이 불면/바람에 흔들릴라요.’(후략)
‘산굽이를 돌아가는 강물을 따라 여러 사람들이 오래오래 걸으니 세상으로 가는
길이 생겼더라. 그 길에 봄여름가을겨울이 지나고 해와 달이 수도 없이 뜨고 졌으니
길이 아름다워졌더라. 그 강물을 따라 하늘을 보며 그들과 한 몸이 되어 천천히 걸으
라. 시인이 되어보라’라는 당부의 말도 덧붙여 있다.



시인이 천국의 길이라고 했던 강 길을 묵언으로 걸어보자. 가끔 하늘과 맞닿은 산을
바라다보고, 풀숲에 눈을 맞춰보자. 봄이면 봄꽃이온 산을 물들이고 여름이면 산딸기가 지천이고, 산
수국이며 보기 드문 물레나물 노란 꽃까지 피고 진다. 그 십리 길을 천천히 걷다보면, 강 길 따라 한평생
농사일을 통해 삶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를 깨달았을 강가 사람들과, 묵묵히 그들을 지키며 흐르는 정
겨운 섬진강을 만난다. 그들에게 길을 묻는다.섬진강 상류에 자리한 천담마을은,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물이 활처럼 휘어 흐르고 있다 하여 ‘천담川潭’이라고 한다.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주 촬영지였던 천담마을(옛 천담분교)을 지나 강 언덕이 아름다운 구담마을
까지 다시 강 길을 걸어보자. 아스팔트 시멘트 길을 따라가다 왼쪽으로 강으로 접어
드는 길이 있다. 구담마을은 마을 높은 곳에 정자나무 고목들이 있다. 아래로 굽이굽
이 휘돌아 흐르는 섬진강가 마을을 보고 있노라면 보는 내가 평화가 된다. 강 건너 싸
리재마을까지는 물이 깊지 않아 걸어서 건너기도 한다고 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김
훈의 『자전거 여행』에서 섬진강을 이야기한 싸리재와 장구목 요강바위를 찾아가 그
사연을 들어봐도 좋겠다.



강원도 춘천경춘선을 따라 김유정 문학기행에 나서다
김유정 생가, 문학촌 → 실레마을 → 산국농장
청량리에서 경춘선 기차에 올라 삶은 달걀과 사이다로 추억을 나누다 보면 김유정역
(옛 신남역)이다. 길 건너 200여 미터 걸어들어 가면 김유정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우
리말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살려 썼다는 김유정을 만나보자. 그의 애절한 사랑이야기
도 함께 만날 수 있다.

「봄봄」, 「동백꽃」의 작가 김유정은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 리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시루 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라고 자신의 고향 마을을
이야기했다. 김유정 작품의 대부분이 이곳 실레마을과 둘레 금병산을 배경으로 한다.

점순이, 봉필영감, 애틋한 산골나그네를 산언저리 마을길 어디에서 만나지 않을까 두
리번거리게 된다. 마을엔 부추 농사가 풍성하다. 마을을 지나다 밭일하는 어르신을 만
나면 살찐 실레부추 한 아름 베어 사와도 좋겠다. 김유정 생가에서 금병산 자락을 바라
보면 산국농장이 있다. 노란 동백꽃(생강나무) 알싸한 향이 느껴질 것 같은 소설 「동백
꽃」의 배경지다. 산국농장에는 산지기 김회목 시인이 산다. 당신은 등기상 주인일 뿐
이 농장의 주인은 찾아오는 사람들이라 말씀하시는, 인디언을 닮은 할아버지를 찾아
뵙고 자연을 닮은 그분의 이야기도 듣고 오길 바란다. 김유정문학축제 즈음인 봄에는
복사꽃이 황홀하고 여름에는 실하고 달콤한 복숭아를 만날 수 있고 가을에는 산에 지천한
밤을 주워 볼 수 있다.

▨ 김유정문학촌 http://www.kimyoujeong.org (033)261-4650
▨ 산국농장 http://www.sangook.com (033)262-9946



경북안동 우리의 영원한 성자聖子 권정생선생을 찾아떠나는 하루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 조탑리 권정생 선생님 집 → 『한티재 하늘』 문학기행·『몽실 언니』 문학기행



병마를 끌어안고 묵묵히 견디어 온 그 삶이 수행 그 자체다. 우리 곁을 떠나신 지 3
주기, 선생님의 삶의 흔적을 찾은 많은 사람들은 절로 맑아지는 기운을 받는다. 선생
님의 유언장이 우리에게 또 한 번 긴 여운을 준다.

권정생 선생님께서 사시던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에 들어서면 특이한 오층 전탑
이 먼저 마중한다. 길 한편으로 선생이 종지기로 16년을 지내셨다는 일직교회가 보
이고, 이정표를 따라 마을길을 조금 걸어들어 가면 소박한 오두막이 있다. 마당에는
갖가지 작은 나무들이 있다. 5월에 가면 송알송알 앵두가 맺혀있어 선생님을 더 그립
게 한다. 마당 풀숲 사이로 길러 드시던 약초들이며 부추 밭이며 함께 지내던 강아지
뺑덕이 집도 그대로다. 둘러보고 있노라면 잔잔하게 정화됨을 느낀다. 집 뒤쪽으로
낮은 빌뱅이 언덕에 오르면 선생님 오두막의 붉은 지붕이 보이고 사과나무 밭이 유
난히 많은 조탑마을이 참 고요하다. 선생님 유해를 이곳 빌뱅이 언덕과 그리도 그리
워하던 어머니 산소 옆에 나눠 뿌렸다니 빌뱅이 언덕이 묘소인 셈이다. 선생님의 자
취는 안동시내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안 전시실에서도 만날 수 있다. 권정생어린이
문화재단에 먼저 들러 자세한 길 안내를 받는 것이 좋겠다.
▨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경북 안동시 명륜동 317-1번지 (054)858-0808



⊙ 권정생 선생의 『한티재 하늘』 문학기행
『한티재 하늘』은 2권에서 멈춘 미완의 작품이다. 권정생 선생님의 건강이 허
락되지 않은 탓도 있지만 등장인물 대부분이 인근 지역 실존 인물인 까닭에
더 쓰기가 어려웠다고도 한다.

문노인, 조석, 배서방, 윤서방, 수동댁, 분들네, 분옥이, 이석이, 이순이, 이
금이, 실겅이, 참봉어른, 달옥이, 정원네……. 100여 명을 훌쩍 넘기는 등장
인물 모두가 주인공이다. 1800년대 말 우리 백성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있어 ‘백
성의 문학’이라 평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그 힘겨움과 서러움이 읽는 이에
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읽는 내내 속 깊은 울음을 울게 하는 책이다. 한티재는 산으로
둘러싸인 안동을 대구와 연결시켜주는 고개다. 지금은 큰 도로에 자동차가 지나갈 뿐
사람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지만, 그 옛날 수많은 희망과 아픈 사연을 안은 주
인공들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고개다.

삼을 가꿔 옷감을 짜던 집이 많았다는 삼밭골은 지금의 행정 명칭으로는 안동시
일직면 평팔리 명진리 광연리 일대라고 한다. 마을 앞에 큰 바위가 있어서 동리에 갈
때 돌아서 간다고 회암 또는 도름바우로 전해지고 있다는 도름바우회암(광연리) 마
을표지판 앞에 서면,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미천 강둑길이 아스라한 절망과 희망을
느끼게 한다. 중앙선 철길 옆으로 호젓한 삼밭골 마을길에서는 이순을 만날 것만 같
은 설렘이 인다.

수수한 산봉우리 행기봉, 돌음산, 도름바우골, 괴인테숲, 행기봉 아래 향교골…….
삼밭골 마을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 안동 사투리 정겨운 그 많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까?



⊙ 『몽실 언니』 문학기행
올해 들어 처음으로 권정생 선생님의 대표작『몽실 언니』 문학기행이 시작되었다. 권정생어
린이문화재단과 안동지역 문화지킴이들이 그동안 발품을 들여 찾아낸 곳이라 한다. 『몽실 언
니』는 보건소에 약 타러 갔던 권정생 선생님이 그곳에서 만난 절강마을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모티브를 잡아 썼다고 한다.

작품의 주 무대는 노루실(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노래골 일대)과 댓골(청송군 현서면 화목
리 댓골 일대)이다. 해방 후 몽실이네는 살강마을(의성군 단촌면 구계리)에 정착하지만
어머니 밀양댁이 몽실이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해서 댓골에 사는 김씨에게 개가한다.

몽실은 여기에서 다리병신이 되어 고모손에 이끌려 노루실로 온다.
돈벌이에서 돌아온 친아버지 정씨와 새엄마, 동생 난남이와 살던 곳, 노루실은 일직면
운산장터에서 남쪽으로 5리 밖에 있다. 지난해 폐교가 된 망호리의 일직남부초등학교가
있는 골짜기로 그 왼쪽 마을이 노루실이고 오른쪽마을은 비네미다.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옮겨오려고 힘쓰고 있는 일직남부초등학교는 제법 너른 운동장에
학교를 빙 둘러 나무가 울창한 예쁜 학교다. 『몽실 언니』의 인연으로 이곳에 권정생어린이
문화재단이 들어오길 바래본다.

댓골은 청송군 현서면 화목리다. 골짜기가 대통같이 곧게 뻗어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면소재지 정도의 제법 큰 마을이다. 노루실에서 운산장터 운산역까지
는 2km지만, 기차 시간이 잦지 않았던 당시에는 의성역에 도착해도 댓골까지 20km,
걸어서 다섯 시간은 걸렸을 이 길을 걸어 몽실이는 엄마 집과 아버지 사이를 오갔다.
지난 5월, 볕이 쨍쨍한 날 흙먼지 나는 길을 잠시 걸어보니 몽실이가 느꼈을 팍팍함이
절로 느껴져 눈물이 났다. 댓골(화목리)은 선생의 외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선생은
1946년 일본에서 돌아와 이곳 외가에서 약 2년 정도 살면서 이오덕 선생님이 재직하
던 화목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화목초등학교를 나와 오른쪽 장터 골목을 지나면
선생의 외가가 있다.

전쟁은 많은 사람들의 삶을 뒤틀어놓았다. 특히 여성과 어린아이들에게 더 가혹
했다. 『몽실 언니』 로 대표되는 우리네 언니들의 삶이 기구하기만 하다.



이번 답사를 계기로 살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곳부터 문학답사 기획을 해보자.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책을 읽고 하는 현장답사 기획 공모’를 해보면
좋겠다. 그래서 아이들이 준비한 문학답사를 어른들이 따라가 보자. 학생들과 함께
문학기행을 준비한다면 책을 충실히 읽고 떠나기 전 준비활동도 잘 하게 될 것이다.

책을 읽고 그 자취를 찾아 나서보는 거다. 그 글의 배경이 됐던 곳, 작가의 생가,
무엇보다 지금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중요하다. 책읽기를 통해
새로운 만남과 직접 체험이라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그 고장의 옛이야기를
찾아보거나, 여행길에 민요를 채록하고 배워도 볼 수도 있겠다. 그 이야기와 노래를
불렀을 선인들을 만나보는 것도 좋은 여행이 될 것이다. 생존하는 작가라면 아이들이
섭외능력을 발휘해 만남의 자리를 마련해보도록 도와보자.

참여자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현장활동과 사후활동을 모둠활동으로 생각해보자.
모둠별로 작품 속 현장을 찍어 포토에세이를 만들어보아도 좋겠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오늘을 산다면 어떤 모습일지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재해석해낼
수 있는 기회를 즉흥극으로 만들어 보자. 문학기행 기획하기, 기행신문 발간하기,
문학지도 만들기, 시인의 시로 자신들의 심경을 담아 패러디 시를 써보는 일도
재밌겠다. 아이들이 만들어 낼 참신한 문학기행지도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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