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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시민성+청소년 참정권(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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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8-04-03 11:42 조회 3,86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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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정권이 인권인 이유
청소년 참정권 보장과 선거 연령 하향이 시급하다
 
쥬리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
 
 
청소년은 과연 미성숙할까?
초등학교 시절, 선거권 등이 포함된 ‘참정권’은 국민의 5대 기본권 중 하나라고 배운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만 19세 미만 청소년은 이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조항으로 시작한다. 민주공화국의 일원으로서 권력(주권)을 행사하는 기본 방식은 참정권의 행사이며, 정당 활동 등이 일상적이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는 대개 선거권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18세 선거권’에 대한 찬반 논쟁은 누구나 한 번쯤 접해 봤을 것이다. 실제로 1980년에 이미 신민당 국회의원들이 선거 연령을 18세로 낮추자고 주장한 바 있을 만큼 이 문제는 오래된 논쟁거리다1). 현재 시점에서 만약 지금 선거 연령이 18세로 낮아진다면 올해 지방선거에 투표권을 갖게 되는 인구는 60만여 명 정도 된다. 이는 일부 지역에서는 선거의 결과가 달라지는 변수가 될 수도 있을 만한 숫자이며, 당사자들에겐 당장 이번 선거에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을지의 여부가 결정되는 문제이다. 선거 연령 하향 문제는 그렇게 오랫동안 논의되고도 왜 입법의 성과를 내지 못할까? 선거권 등이 포함된 참정권은 국민의 5대 기본권 중 하나로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는데 왜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만 19세 미만 청소년은 이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을까?

 
만 18세(청소년)는 미성숙하므로 참정권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논거는 선거 연령 하향 및 청소년 참정권 보장을 반대하는 거의 모든 논리에 바탕으로 깔려 있는 핵심 주장이다. 그러나 외국 사례 및 일반 상식으로도 쉽게 반박이 가능한 논거이기도 하다. OECD 국가 중 한국만이 유일하게 만 19세로 가장 높은 선거 연령 장벽을 갖고 있다. 오스트리
아, 독일의 일부 주, 스코틀랜드, 아르헨티나 등의 선거 연령은 만 16세이며, 수십 년 전 선거 연령을 만 18세로 정한 미국과 유럽의 나라들에서는 선거 연령을 만 16세로 하향하자는 논의들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독일, 영국 등 유럽의 많은 나라들의 지방선거 연령이 이미 만 16세이다. 한국 청소년들이 미국이나 일본, 독일, 오스트리아 등 외국의 청소년들에 비해 본질적으로 미성숙하다고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약 외국에 비해 한국의 청소년들이 미성숙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가 청소년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에 계발되지 못한 부분일 것이며, 이는 더욱 참정권 등 여타의 권리를 보장해야 할 근거가 된다.
 
권리가 보장돼야 청소년도 달라질 수 있다
미국의 어느 교실에서 실행된 유명한 실험이 있다. 담임교사에게 학생들의 ‘심리 검사 결과’라며 자료를 제공하고 이후 결과를 측정했더니, 지적 능력이 높다고 설명된 학생일수록 더 높은 학업 성취도를 보였다는 실험이다. 그 ‘심리 검사 결과’는 실제 학생들을 검사한 것이 아닌 무작위로 배분된 결과였지만, 자료를 제공받고 선입견을 갖게 된 담임교사의 태도에 따라 학생들의 성취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 실험은 사람이 기대받는 대로 행동하게 되는 현상을 설명하는 실험으로 자주 인용된다.

 
“청소년은 미성숙하다.” 모든 청소년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이야기다. 설령 직접적표현으로 듣진 않더라도 청소년의 특성을 ‘미성숙함’으로 전제하는 문화는 우리 사회 전역에 존재하기에 어떤 청소년이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미성숙하다고 여겨질수록 실제로 미성숙해질 수 있다. ‘중 2병’, ‘급식충’ 등으로 청소년을 비하하는 행태가 사라지고, 참정권 등 인간으로서 책임감을 다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될 때 청소년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만 18세(청소년)는 성인과 달리 의무-세금 납부-를 다하지 않으므로 참정권 등 권리를 주어선 안 된다는 논리도 선거 연령 하향을 반대하는 논거로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이 역시 불충분한 논리이다. 이미 우리 사회의 구성원 중에는 임금을 받는 노동을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에 따라 세금 납부도 하지 않는 경우가 존재한다.
집과 직장을 잃고 길바닥에서 생활하는 노숙인에게, 너는 세금을 내지 않으니 투표권을 빼앗겠다고 말할 것인가? 세금 납부액보다 복지 지원을 받는 금액이 더 큰 사람들은 참정권을 누릴 자격이 없는가? 당연히 아니다. 세금은 원래 필요한 사람에게 더 배분하기 위해 걷는 것이며,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죽을 때까지 노동을 하며 살 수는 없다. 일정 정도 나이를 먹어 몸이 커지고 힘이 세질 때까지는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 착취를 방지하는 것이고, 하루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학교를 다니는 사람에게 따로 일자리를 구하라고 요구하긴 어렵다. 참정권은 세금의 대가가 아니다. 권리는 누구나 행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지원은 필요한 사람 누구나 받아야 하는 것이며, 세금을 납부하고 노동을 하는 것은 그것이 가능한 사람들이, 가능한 인생의 시기 동안 하는 것이다. 사람의 가치는 세금을 얼마냈는지, 돈을 얼마 벌었는지로 결정되지 않는다.
 
또 사람들이 자주 간과하는 것이 있다. 선거권 등 참정권은 만 19세 이상에게만 보장되는 반면, 세금 납부를 하고 군대에 가기 시작하는 나이는 만 18세부터이다. 법적으로 노동을 할 수 있는 나이는 만 15세부터이며, 실제로 많은 청소년들이 일자리를 가지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고 세금을 납부하고 있다. 이는 ‘의무를 다하지 않으므로 권리를 줄 수 없다.’는 논리의 빈약함을 보여 주는 현실의 증거인 셈이다.
 
 
선거 연령 하향 = 민주주의 확대
청소년 중에도 선거 연령 하향이나 참정권 보장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선거권이 있어도 어차피 찍을 사람 없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참정권은 단지 선거일에 투표소에 들어가 도장 하나 찍을 수 있는가에 관한 권리가 아니다. 참정권이 있는 ‘유권자’가 된다는 것은, 이 사회에서 누리는 지위 자체가 크게 바뀌는 문제다. 선거에 참여하건 하지 않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권자가 되면, 정치인들과 정당이 표를 얻기 위해 그들에게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많은 학생들이 고통을 겪는 체벌과 두발 복장 규제, 소지품 압수 등 학생 인권 문제만 봐도 그렇다. 2006년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법률이 국회에서 발의되었지만 일부 교사단체2) 등 어른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2017년부터 다시 학생인권법을 제정하기 위한 운동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국회에서는 발의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며, 그 이전에도 지역별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지만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제정되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는 학생인권의 당사자인 초중고 학생들이 유권자가 아닌 데서 기인한다. 만약 학생 당사자들이 표를 행사할 수 있는 유권자라면, 국회의원들이 앞다투어 학생인권법을 발의하고 교육감들은 지역 내 학생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게 될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또는 사회에서 청소년으로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그건 일차적으로 당신이 유권자가 아니기 때문일 수 있다.

 
민주주의는 잘난 사람들만 참여하는 제도가 아니다. 참정권을 보장하는 데 자격을 묻기 시작한다면 그 끝은 ‘독재’일 것이다. 인류는 재산, 인종, 성별 등의 참정권 자격 장벽을 하나씩 무너뜨리며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왔다. 이제 남은 것은 나이 기준뿐이다. 21세기 청소년 참정권 운동가들이 듣는 말들은, 19세기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들었던 말들
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여성들은 충분히 교육받지 못했고, 이성적이지 못하며, 참정권을갖게 되면 남편을 따라 투표할 것”이라던 남성 우월론자들의 말들은 “청소년들은 충분히 교육받지 못했고, 판단력이 부족하며, 참정권을 갖게 되면 부모 따라 투표할 것”이라는 말들로 부활하고 있다. 참정권은 인권이며, 선거 연령 하향은 곧 민주주의의 확대이다.
 
 
1) “新民(신민)「 내각책임제」로 격론 벌여” <경향신문>, 1980년 2월 11일자 기사
2)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 를 말한다.
 
 
 
 
 
청소년의 입을 막는 것들
 
이은선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공동 대표
 
 
울산에서 학생인권조례를 만들려고 했다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면서 교사로부터 폭력, 성희롱,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내가 학교폭력을 당하는 것을 학교가 방관하는 일도 경험했다. 그렇게 어렵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별로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학생회장이 되었지만 학교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었다. 학교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나와 같은 피해자들이 이후에도 계속 나올 것 같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개선해 나갈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했다. 경기도, 광주, 서울, 전북에서 제정되어 시행 중인 학생인권조례에 눈길이 갔다. 저런 법이 있다면 내가 겪었던 것과 같은 문제들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가 살고 있는 울산광역시에서도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어 보자고 나서서 준비하게 되었다. 나는 학생인권조례가 정말 반대할 이유가 없는 조례라고 생각했다. 학생들의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한다는 내용인데 왜 반대한다는 말인가. 어른들은 우리 청소년들을 사랑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한다.
차별과 폭력, 성추행 등 각종 인권 침해를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의 조례를 설마 반대할까 싶었다. 하지만 시의원을 만나 이야기하는 첫걸음부터 난관이었다. 학생인권조례 요구안과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서명지를 모아서 시의원을 찾아갔다. 시의원으로부터 처음에 들은 말은, “학생인권조례 제정은 99% 불가능하고 5년 이상 걸린다.”였다. 그 시의원은 아직 조례 제정을 본격적으로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회의적인 의견부터 내며 손사래를 쳤다. “저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명도 많이 받았습니다. 학생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조례입니다.”라고 대답했지만, 그는 “정책을 만드는 사람의 일이다.”, “제정하는 사람도 어차피 정치인인 나다.”라고 이야기했다. 국민이 원하는 정책을 만드는 것이 정치인의 일인 줄 알았는데, 청소년, 학생은 국민도 아닌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혼자서라도 준비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리를 나왔다.
하지만 울산의 한 사립고등학교의 학생인권 사례들이 SNS에 퍼지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관심을 가지지 않던 시의원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어 보겠다며 2명이나 나서서 기자회견을 했다. 그중 1명은 이미 만났던 사람이었던지라, 새롭게 입장을 발표한 시의원을 찾아갔다. 학생들이 요구하는 내용들을 조사하고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타 학교의 상황까지 수집해서 갔다. 하지만 우리의 요구안을 읽어보지도 않은 채
“이미 조례에 다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야.”라고 했다. 청소년의 이야기를 존중하지 않는 시의원의 태도에 실망했다. 또한 그 시의원이 준비하는 조례안을 검토해 보기 위해 한 부 달라고 요구했지만 안 된다고 했다. 교사들 사이에서는 이미 공유되고 있다고 들었는데, 왜 학생에게는 공유하지 않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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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정치인들 총알받이다”
학생인권조례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고3인 나는 학교에 붙들려 있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방과 후 수업을 하지 않기 위해 담임선생님께 찾아갔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남아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선생님께서는 “방과 후 안 하는 애들은 대학 포기하겠다는 이야기로 들려. 예체능 애들도 그렇고.”라고 하셨다. “저는 대학교에 욕심 없어요.”라고 대답하자, 사건이 시작되었다. 전체 교사들에게 내가 대학교를 포기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학생회 선배들에게까지 소문이 퍼져서 자꾸 연락이 왔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부모님에게도 연락을 해서, 내가 좋지 않은 활동을 하고 있다며 내가 이상한 곳에 빠진 거 같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계속 여러 학교의 학생인권 침해 사례를 모았다. 아무래도 내가 보고 듣고 겪다 보니, 자료 중에는 당연히 우리 학교 사례가 많았다. 자료들을 국회의원 보좌관, 국민신문고 등에 올리며 외부에서도 학교 안의 문제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알린 문제들 때문에 우리 학교에 조사를 하러 오기도 했고, 학교의 인권침해 사례가 지역 신문기사로 나오게 되었다. 기사가 나오자마자 교장선생님은 내가 학교를 이 꼴로 만들었다며 공개적인 장소에서 화를 냈다. 그리고는 갑자기 불러 “너는 지금 정치인들 총알받이다.”라고 내 활동을 비하했다. 그리고 학교의 일들을 언급하면서 “이것도 인권침해냐? 아니지?학교 일은 학교 내부에서 해결해야지.” 등의 이야기를 했다.
교장선생님의 말을 들으니 억울했다. 그동안 나는 학교 내부에서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학생부장 선생님을 찾아가 학교의 여러 인권침해를 바꾸기 위해 건의했지만, 부장선생님은 “너, 선생님이 지금 처음 왔다고 무시하냐? 다 바꾸려고 하네.”라고 화를 냈다. 내부에서 해결하려고 하면 손쉽게 입을 막아버리고, 해결할 수 있는 길도 만들어놓지 않았는데, 문제점을 외부에 알렸다는 것으로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했지만, 교사들은 내가 학교를 팔아먹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퍼뜨렸다. 지금도 교육청 지침으로 교칙이 조금 수정됐을 뿐, 학교는 여전히 학생들을 존중하지 않고 있다.
 
나는 시민이다
내가 겪은 청소년의 삶은, 나의 의견이 학교 안에서도 밖에서도 쉽게 묵살되는 것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 법이나 학교 규칙으로도 청소년은 선거권도 없고 선거운동이나 정당 가입 등의 정치활동이 여러 가지 제약당하고 있다. 학교 규칙에는 정치활동 시 퇴학까지 가능하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또한 청소년들에게는 언어폭력이나 체벌 등의 폭력이 가해져도, 교육을 위한 거라는 핑계를 대며 그냥 넘어가는 것이 우리 사회의 분위기다. 청소년의 사생활도 신체의 자유도 존중하지 않는데, 청소년의 의견을 비중 있게 생각할 리가 없다. 이처럼 청소년을 평등한 시민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청소년의 입은 막히고 청소년의 의견은 귀 기울여지지 않으며 청소년에게 참정권도 보장되지 않는다. 또 반대로 청소년에게 참정권이 없기에 청소년의 여러 인권이 쉽게 침해당하고 있다. 청소년의 인권을 위한 법이나 제도를 잘 만들지 않으니까.

나는 청소년의 문제를 어른들에게 대신 해결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지쳤고, 그렇게 해서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청소년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있도록 선거권 제한 연령이나 피선거권도 확 낮춰야 하고, 정치활동과 참여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또한 전국적으로 모든 청소년이 동등하게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어린이·청소년인권법이 제정되고, 학생인권을 보장하는 법률이 만들어져야 한다. 청소년이라고 자유가 뺏겨야 될 이유는 없다. 나는 학생이자 청소년이고 그리고 시민이다.
 
 
 
 
 
고르게 사회 참여를 할 수 있는
퍼즐 한 조각,
청소년 참정권

박경석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광장에 나오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정치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시작됐을 무렵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그게 정치와 관련된 건지도 몰랐다. 아니 광우병이 뭔지조차 몰랐다. 내게 있어 촛불 시위란, 부모님 손잡고 따라가서 동네 친구들을 만나고 즐겁게 노는 것이었다. 초등학교에서 나이를 차츰 먹고 이곳저곳 따라다니다보니 그게 정치고, ‘정치 참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릴 적 나에게 촛불 시위가 놀이터였듯, 무엇이 정치이고 어떤 것이 정치 참여인지 대강은 아는 지금도 내게 정치란 심심할 때 한 조각씩 맞추는 퍼즐 같은 것이다. 학교에서 할 일이 없을 때 정치면 기사를 읽고, 점심시간에 컴퓨터실 컴퓨터로 각종 정치 사설이나 글을 읽거나 집회 영상 등을 보는 게 학교에서 가지는 나름의 낙이다. 물론 내가 관심 있고 잘 아는 분야라서 이해도 잘 되고 재밌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사실 나는 정치가 어려운 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치가 계속 일반 사람들에게 어려워지고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라면, 몇몇 소수 계층이나 기존의 정치가, 자본가들만 정치에 참여하고 그에 대한 혜택을 누릴 수 있게끔 된다고 생각한다. 정치가 계속 어려워지면 힘없고 가진 것 없고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대다수 사람들은 정치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몇몇 소수의 집단과 계층들만의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해야 하는 가장 큰 일은, 정치가 결코 어려운 게 아니라는 것을 민중들에게 보여 주고 생활에서 직접 와 닿게끔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해 자신들의 의견을 낼 수 있게끔 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정치가 발전할 수 있고, 더 민주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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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 이후의 깨달음
본론으로 돌아와서, 앞서 얘기했듯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초등학교 도서관이 워낙 커서 웬만한 중소 규모 도서관들에 있을 만한 책은 다 있었다. 초등학교 도서관이었지만 정치와 사회에 관한 책이 많았다. 『재미있는 선거와 정치 이야기』, 『십시일反』,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 인권을 넘보다 ㅋㅋ』와 같은 책을 읽고 많은 것을 느꼈다. ‘이전에 부모님 손잡고 간 그곳들이, 촛불을 들고 마냥 뛰어 놀던 그곳이 그런 곳이었구나.’, ‘어른들이 그래서 그 대머리에 눈 작고 얼굴 긴 할아버지를 그렇게 욕하던 것이었구나.’ 하며 하나하나 알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차츰차츰 알아가면서 인간이 뭔지, 인권이 뭔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몸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구는 이렇게 편하게 여름에는 춥고 겨울에는 더운 도서관에 늘어지게 앉아서 책이나 읽는데 또 다른 누구는 일터에서, 학교에서, 삶터에서 내몰려 거리에 광장에 나앉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거리에 내몰린 사람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고, 그렇게 책에서만 살던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 보니 이 사람들의 삶과 지금 나의 삶이 별로 동떨어진 삶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를 본격적으로 ‘생활 정치’를 하게 만든 시간이 다가왔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꼭 1년이 되는 해였다. 나는 학교 안에서 학생들에게 세월호 추모 배지와 스티커를 나눠 주었는데, 학교에서 그 배지와 스티커가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빼앗았다. 이후 며칠 뒤 세월호 추모와 관련된 학교 내의 활동을 탄압하지 말라는 교육부의 공문이 발송되고 나서야 학교 측은 학생들에게서 압수했던 배지와 스티커를 돌려주었다. 화가 났다. 그때는 그 이유가 단순히 추모마저 정치적이라는 딱지를 붙여 막는다는 것에 대한 황당함과 분노였다. 조금씩 시간이 흘러 그 일에 대해 돌이켜 생각했을 때에는 ‘그게 왜 정치적인 행위였을까, 그렇다면 정치란 무엇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내가 했던 행위는 정치적인 행위가 맞았다. 그리고 다시 화가 났다. 왜 청소년은, 학생은 정치적 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지, 왜 우리의 정치적 행동을 막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화가 났다.
 
 
여럿이 머리 맞대고 세상에 변화를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정치란 무엇일까. 정치란 나에게 퍼즐 같은 것이었다. 심심할 때 한 조각씩 맞춰 나가는, 가끔 풀리지 않아 힘들고 머리를 싸매게 하는 날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조각씩 맞춰 나가게 되는, 중독성 강한 일이다. 나에게만 정치가 그렇게 다가올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청소년들에게 정치가 그렇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소년들이 변할 것이 아니라 정치와 학교가 그렇게 변해야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정치에 관한 수업을 더 자세하게 하고, 청소년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보장은 못할지라도 막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정치판도 바뀌어야 한다. 정치가 몇몇 계층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을 넘어 노동자, 농민, 청소년,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더 많은 계층의 사람들의 의견을 대변하고 의사를 개진해 정책이나 법안 등에 반영될 수 있도록 정치판이 바뀌어야 한다.
처음 이야기했던 퍼즐 이야기를 다시 해 보자. 수백 조각짜리 퍼즐을 맞출 때를 생각해 보자. 몇 백 조각의 퍼즐을 한 사람이 혼자 맞추면 더디고 어렵지만,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맞춰 간다면 가끔 다투는 일이 생기더라도 혼자 맞출 때보다 더 쉽고 정확하게 맞춰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정치도 똑같다. 나이가 적든 많든 더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적극
적이고 직접적으로 참여할 때 정치가 더 발전할 수 있다.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삶의 문제를 정치를 통해 풀어나가게 된다면, 분명 그 사회는 훨씬 더 멋진 사회가 될 것이다.

요즘 들어 한국 사회 정치의 위기 어쩌구 하는 말들이 뉴스에 자주 나온다. 고인 물은 썩는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낡기 마련이고 새롭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이 세상을 바꾼다. 낡은 사람들이 새롭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내겠는가? 새로운 사람들이 그런 아이디어를 내겠는가? 이제, 새롭고 번뜩이는 사람들이 정치로 뛰어들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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