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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도서관에 살어리랏다 거기 내 사랑하는 아이들 있으니… - 도서관에서 그대는 누구를 만났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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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8-04 14:04 조회 8,08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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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달콤한 바닐라 향
도서관에 대한 첫 기억에 대해 누군가가 물으면 내 삶에서 도서관에 대한 첫 기억은 달콤한 바닐라 향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한 손에 꽉 넘치게 잡히던 그 당시 가장 비싼 아이스크림이었던 ‘빵빠레’의 폭신하고 부드러우며 하얗게 유려한 곡선을 그리던 그 나선형의 탑과 손에 찐득하게 녹아 흐르던 느낌. 그래도 차마 깨물어 먹기 아까워서 하염없이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던 나. 기억 속 사진에 선명히 박혀 있는 건 도서관 서가에 가득 꽂혀 있던 책도, 책 읽어주는 나직한 목소리도 아닌 아이스크림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바쁘셨다. 돈은 많이 벌지 못했지만 사람들로 항상 북적이던 아버지의 가게 일을 돕느라, 어머니가 직접 만들지 않으면 먹지 못하는 까다로운 입맛의 아버지 때문에 매 끼니를 가게로 가져가시느라, 항상 끊임없는 집안일에 딸 셋을 건사하시느라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항상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셨다. 그래도 타고난 천성이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계셔서 그 바쁜 와중에도 스티로폼을 구해와 그 안에 흙을 채우고 상추며, 깻잎이며, 들꽃을 키우셨고, 집 작은 터에는 닭이며, 개며, 오리며, 다람쥐 중 어느 한 마리의 생명체는 꼭 있었다.

그런 어머니가 동화책 한 권을 읽어줄 여유가 있을 리는 없는 일. 시간은 남아돌고 동네 아이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내가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루에 한 시간도 안 되던 만화 프로를 기다리거나, 사촌이 읽다 넘긴 오래된 동화책이며 위인전을 몇 번을 반복해 읽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날 데리고 갈 곳이 있다며 손을 끌고 나들이를 나가셨다. 후에 안 일이지만, 워낙 일이 많고 아버지가 시시때때로 찾아대는 상황이라 움직임이 제한적이었던 어머니가 마을 문화회관에서 하는 꽃꽂이 강습을 꼭 듣고 싶은데 상황이 어려우니 어린 딸을 앞세우신 거였다. 할 일이라곤 없으니 집에 있는 몇 권 안 되는 책을 읽고 또 읽고, 밥상머리에서도 읽고 잠자리에서도 읽어대는 어린 딸에게 도서관에서 다양한 책을 보여주겠단 명분이셨다. 다행히 문화회관 바로 옆에 도서관이 있어 딸은 도서관에 놓아두고 꽃꽂이 강습을 가면 되겠거니 생각한 어머니는 날 도서관에 데려다 놓으시곤 휭하니 사라져버리셨다. 아, 갑자기 천애고아가 되어버린 상황. 어릴 때 유난히 늦되어 울음도 많고 겁도 많던 난 뜬금없이 넓고 무섭게 생긴 건물에 혼자 남겨졌으니 겁나고 어찌할지 몰라 눈물만 뚝뚝 떨구며 아동도서실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신발장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왜 그렇게 도서관이 넓고 무서워 보였는지. 삭막하게 흰색으로 벽을 칠해 놔서였는지, 옛날 건물 특유의 음산한 기운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정말 세상에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 도서관 대출대에 앉아 있던 아저씨가 천천히 다가왔다. 울지 말고 들어와서 책 읽어라 하는데, 엄마도 없으니 이 사람이라도 구원자로 삼아야 되는 상황이라 두말 않고 그 아저씨를 따라 들어갔다. –생각해보니 타고난 길치라 그런지 어린 시절 집 앞길만 나가도 길을 잃어버려서 앙앙 울고 있으면 지나가는 아저씨들이 손을 잡고 엄마를 찾아주곤 했다. 이 나이까지 유괴 한 번 안 당하고 잘 살고 있는 걸 보니 그래도 그 시절엔 아직 인심이 좋았거나 아니면 내 옷의 행태가 유괴해봐야 앨 먹여살려야겠다고 걱정되는 상황이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아저씨가 골라주던 그림책들. 아! 세상에나. 세상에 이런 책들이 있다니. 눈물 콧물이 흐르는 것을 옷으로 쓱 닦고 책을 쳐다보는데 아직도 그 느낌은 꽤 생생하다.

어린 눈에 집에서만 보아오던 겉면이 들린 단순한 내용의 그림책과 딱딱하기만 한 위인전이 아닌 그 수많은 책들이라니. 온갖 형형색색의 색감으로 칠해 놓은 그림책이라니. 엄마가 오거나 말거나 숨을 죽여가며 책을 한 권 한 권 골라내고 마음껏 쌓아서 읽어낼 때의 그 설렘과 쾌감. 얼마 뒤 날 찾으러 온 엄마는 자신의 예상대로 책을 잘 읽고 읽는 어린 딸을 기특해 하며 도서관을 나와 도서관 앞 작은 슈퍼에서 그때 돈으로 200원인가 했을 가장 비싸서 감히 사 먹을 생각도 못했던 아이스크림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세상에.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데 거기에 아이스크림까지 먹을 수 있다니. 아! 그 달달한 바닐라 향 냄새. 엄마에 대한 섭섭함은 이미 안드로메다 어디쯤 사라졌고 나를 이런 곳에 데려와서 아이스크림까지 사주신 엄마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똘똘 뭉친 채 엄마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 내가 낼 수 있는 모든 시간 그 도서관에 가서 산 건…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열다섯, 어둡고 긴 터널
유난히 사춘기가 심했다. 책을 많이 읽는 아이들의 문제가 현실감각이 없고, 간접경험만으로 세상을 다 안다 착각하는 것인데, 내가 딱 그 짝이었다. 세상을 이미 다 아는 것 같고, 그래서 마냥 답답하고 짜증나는 일 천지에 현실감각이 떨어지니 친구 관계조차 원만할 리 없었다. 학교도 싫고 집도 싫고 친구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책밖에 없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래도 사랑받고 관심받고 싶은 것 또한 한마음이지만 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지내는 시간이었다.

그때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교실에 혼자 앉아 있는 상황을 견디기 위해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수많은 책 중에 『파워 오브 원』이라는 책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영국계 아이가, 독일인 학교 기숙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많은 고통과 왕따를 겪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채 어머니에게 돌아가, 그곳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상처를 치유해가고, 그 과정에서 배운 권투로 유명해지며, 이후 남아프리카 흑인 인권을 돕고, 결국 어린 시절 기숙사에서 겪었던 가장 깊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이야기였다. 아,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그 머리를 띵하고 치던 그 느낌. 독일인 기숙사에서 적대국의 아이로서 경험한 그 수많은 상처들. 그 상처들 속에서도 난 상처받았어, 나약하게 울거나 무너지지 않고 한 사람의 멋진 어른이 되어가는 주인공 이야기에서 삶을 구원받은 느낌이었다. 최근 나오고 있는 문학치료를 뜻하지 않게 온몸으로 경험한 케이스일까? 주인공이 상처받고 다친 자기의 내면과 마주하기 위한 방법으로 인디언 치료법인 상상치료를 하는 장면. 큰 폭포와 일곱 개의 다리를 건너고 폭포에 올라 소리 지르는 그 장면을 나로 바꿔서 몇 십 번을 반복해서 상상했다. 나도 이 우울한 고리를 벗어날 수 있기를. 상처받았다 울지 않고 멋지게 일어나기를 몇 번을 상상했다.

그 책이 고리였을까? 이후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아이들을 만나 친해질 수 있었고 고등학교 때 독서토론동아리에 들어가면서 내가 가진 다양한 장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의 가장 어두운 순간이었던 십대를 함께 해준 도서관. 그리고 책. 장점이 별로 없던 나에게 “도서관에 있는 책은 네가 다 읽겠구나”라며 웃음으로 칭찬한 도서관 사서 아저씨. 그리고 그 사서 아저씨가 상이라며 사줬던 자장면까지. 돌이켜 생각해도 막막한 마음뿐이던 그 시절, 도서관이 없었으면 내 십대의 흔들림은 또 어찌 지났을지…. 그때 도서관에서 만난 사람들, 내 삶을 바꾼 책 한 권을 알게 해준 삶의 운에 감사할 따름이다.

스물넷, 그곳에서 살고 싶다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운 좋게 바로 사서교사 임용고시에 합격했다. 다행히 사서교사를 많이 뽑는 해였고, 모교 고등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아! 학교 대부분의 교사가 내 은사님이거나, 내 언니들의 은사님이거나, 내 동생의 은사님인 분들이었다. 고개를 이리 돌려도 은사님, 저리 말해도 은사님이니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신규 교사라 어리바리한데 소속 부서의 부장선생님까지 은사님이니…. 그저 네! 하고 지낼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그 상황에서 도서실 리모델링이 시작되었다. 유난히 적극적인 부장선생님은 도서실 리모델링을 위해 전담 부서까지 만들었다. 나를 포함한 네 명의 교사는 인테리어 가구 견적 내기 핑계, 선진 학교도서실 탐방 핑계로 근무 시간을 가리지 않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던 한때였다. 리모델링이 끝나고 도서실이 정착되던 2년 정도까지 주 3회 이상 밤 열 시 넘어 집에 들어가는 것은 예사였고 방학 반납에 주말 출장도 많았다. 좋은 점도 많았고 힘든 것도 참 많은 시기였지만 도서실이 점점 구색을 갖춰 가는 건 행복한 경험이었다. 나와 같은 부서의 선생님들이 고른 가구가 도서실을 채우고, 도서실 벽 페인트 칠마저 두세 번 바꾸고, 유리 코팅 문제로 몇 번을 싸워가며 만든 도서실. 리모델링이 끝나고 나선 도서실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그 행복이 얼마나 큰지, 주말엔 부모님을 모시고 내가 만든 도서실이다 자랑하며 도서실을 견학시켜 드렸고, 주말에도 그냥 도서실에 가서 일을 하고 놀았으며, 선생님들과 밤 열 시까지 남아 도서실 빔프로젝트로 최신 영화를 보곤 했다.

충북에서 처음으로 발령받은 사서교사로서의 힘듦, 사서교사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하나하나 부딪쳐야 되는 어려움, 아이들에게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하는지,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이런저런 힘든 일도 참 많았지만 아직 교사로서 철학이 분명이 서 있지 않던 내겐 도서실은 그 자체만으로 뿌듯한 그런 곳이었다.

서른둘, 아직도 마음 설레는 아직, 학교에 가는 아침이 설렌다.
사서교사가 되고 1, 2년이 지나며 너무 힘들다 울기도 많이 울고, 학교에서 비교과 교사로 서럽다 그만두겠다 행패도 부리고, 아이들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좋을지, 도대체 난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사람인 건지 갈피를 못 잡고 수많이 헤맸다. 바깥세상엔 좋은 강연들, 좋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아직 알지 못한 채 맨땅에 기는 심정으로 일을 하나하나 진행했었다. 중간 국어 수업과 국어 보충, 논술 수업을 하며 도대체 사서교사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전과까지 고민해가며 힘들어했다.

그러다 차츰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서실이 가장 좋다는 아이들. 어렸을 때 갈 곳 없어 방황하던 나 같은 아이들. 교실과 운동장에 있을 자리가 없어 도서실 구석 자기만의 아지트를 만드는 아이들, 그 아이들이 점점 사랑스러워졌다. 특히 중학교로 발령받으며 고등학교 아이들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아이들의 상처, 다양함, 순수함이 눈에 들어왔다. 저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어야 되나? 고등학교 때 누누이 들어와 마음속에 익숙해져버린, 학력을 제고시키고 좋은 대학을 보내며 무엇인가 교육해야 되는 교사가 아닌, 그저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의 대화를 들어줄 수 있는 것이 교사의 역할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나와 놀아주는 것이 고마워졌고, 아침저녁 나를 보겠다고 도서실에 놀러오는 아이들이 참으로 예뻤고, 그 바쁜 와중에도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다.

참 늦된 교사다.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고 다양한 선생님들의 사례를 만나면서, 난 왜 이렇게 늦됐을까? 왜 이렇게 늦게 알았을까? 그동안 스쳐 지났던 그 많은 아이들에게 무엇인가 더 줄 수 있었는데…. 시간을 허투루 보내온 그 기간이 참 많이 부끄럽다. 늦어진 만큼 더 열심히 다양한 사례를 배우고, 그 경험을 아이들에게 주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경험한 가장 소중한 것을 주고 싶지 않은가? 내 경우 그것은 책이다. 삶은 행복해야 하고 그 행복을 찾는 많은 방법 중 내가 아는 것은 책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언젠가 나에게…
요즘엔 장래 뭐가 되고 싶니? 라고 물어주는 사람이 없어 슬프다. 아직도 내겐 장래 희망이 많은데! 가장 되고 싶은 건, 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말은 적게 하고 행동을 먼저 하며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아이들에게도 시키지 않는. 아이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내가 만나는 아이들을 사랑하며 또 그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싶다.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아이들 중 내 앞에서 부족한 물속에서 살려달라 숨을 몰아쉬는 아이가 있다면 그 신호를 스쳐 지나지 않고 한 명의 아이를 건져내 물가로 보내주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
마흔 살의 민영아, 쉰 살의 민영아, 넌 아직도 도서실에서 행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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