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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사려 깊은 번역가의 말 걸기] 참 '눈치' 없는 AI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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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6-01-14 15:09 조회 2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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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눈치' 없는 AI 번역

신수진 어린이책 번역가

 
 
인공지능이 번역가라고?
번역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근 단연 화제가 되었던 사건은 구글의 인공지능 제미나이(Google Gemini)가 번역한 서양 고전이 시리즈로 출간된 일이었다. 처음엔 ‘제미나이’가 번역자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는 시대가 왔구나 하며 한숨을 쉬었지만, 책의 다른 요소에 비하면 그건 별로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총 6권의 책 앞표지에는 책제목 위로 “fly over an apartment with silver wings”(은빛 날개로 아파트 위를 날아오르다)라는 영문 모를 문구가 똑같이 올라가 있고, 뒤표지에는 갑분싸, 점메추, 진지스칸 등 온갖 인터넷 신조어 목록이 설명도 맥락도 없이 주르륵 적혀 있었다. ‘서양 고전 문학 시리즈에 2025년 한국에서 만들어진 유행어를 왜 적어 놓지? 고전과 현대의 만남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려고?’ 의문이었지만 역시나 제미나이가 작성한 것 같은 책 소개 문구와 무엇보다 ‘알빠노?’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 용어가 난무하는 본문 번역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충격이었다. 사실 실물로 이 책을 본 적은 없다. 그렇다고 굳이 사서 볼 생각도 없다. 누군가 X(구 트위터)에 올려준 사진들과 인터넷 서점에서 확인한 미리보기 화면만으로도 충분히 숨이 막혀 왔으니까. X에서 활동하는 ‘책과참치’(@booksnchamchi)님의 포스팅에 따르면 이 책을 출간한 곳은 “1993년에 설립되어 기술 분야의 책을 1천 종 이상 출간해 온 학술 출판사”라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책과참치’ 님은 이 책을 두고 “AI가 대세라는 걸 직감한 나이 지긋한 어르신 사장님들이 젊은 직원들을 쪼아서 급조한 흉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고, 서점을 운영하는 내 친구는 장기적으로는 도서관의 고전물 수서 수요를, 단기적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의 납본 보상금을 노리는 것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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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고 의심했다. 국내에서 만들어지는 책

이라면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발행일로

부터 30일 이내에 국립중앙도서관과 국

회도서관에 납본을 해야 한다. 그러면 도

서관에서는 납본 도서에 대해 정가로 책





제미나이가 번역한 서양 고전『 일리아스 Ⅰ』(복두출판사, 2025).

현재 YES24와 알라딘 등 인터넷 서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값을 보상해 준다. AI로 만들어지는 책들이 범람하면서, 이 제도의 취지와 선의를 악용하는 사례들이 너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수서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 동안 건실하게 출판 활동을 해온 출판사가 서양 고전을 시리즈로 낸다고 하면 일단 신뢰할 가능성이 크지 않겠는가. 사서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서양 고전이라는 책제목의 권위만 가지고는 수서할 만한 책인지 아닌지를 도저히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AI가 책 집필에 쓰였음’을 밝히는 책들을 제외하면 되지 않겠냐고 할 수도 있지만, AI를 썼다는 것 자체가 부적격 판단의 근거가 될 수는 없고, 일부분만 AI를 쓴 경우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등 세부 기준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사람의 번역엔‘ 눈치’와‘ 유머’가 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중에도 책을 안 읽고 AI로 책을 요약해 오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본다. 당연히 AI 요약 안에는 잘못된 정보가 있고, 책을 제대로 읽은 다른 학생들은 AI 요약본을 읽고서 ‘아, AI를 썼구나’ 하고 금세 알아차린다. 하지만 당사자는 ‘나는 책을 읽은 것과 다름없으며 주요 내용을 잘 파악하고 있으니 문제가 없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앞으로 논문을 쓰고 지식을 생산하게 될 미래를 떠올린다. 진짜와 가짜가 마구 뒤섞여 판별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되는 건 아닐까. 인간이 ‘생각’을 기계에 맡기며 안심하고 AI가 제공하는 정보를 교수나 전문가의 말 보다 더 신뢰하는 상황은 앞으로 더욱 심화될 것이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을 연구하는 어린이책 번역가로서 살아남으려면 과연 어떤 능력이 필요하려나. 사람의 번역이라고 무조건 믿을 만한 것도 아니고, 기계 번역이라고 해서 다 쓰레기 같은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람이 번역하는 게 더 좋은 대상이 있을 테고, 기계한테 맡기는 게 더 효율 면에서 월등한 대상이 있을 테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현명하게 판단하고 적절히 활용할 것인가다. 다른 문화권의 콘텐츠를 우리 말로 옮기는 일은 특정한 단어를 우리 말 단어로 정확히 대응시키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책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든 알고 있을 것이다. 단어나 문장 하나가 아니라 한 텍스트를 둘러싼 어떤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결국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엉뚱한 결론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좀더 유머러스한 사람이 되고 싶다. 인간이 지닌 최대의 장점은 ‘상황을 센스 있게 잘 읽어내는 눈치’와 ‘유머를 통해 낙관적인 공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제미나이가 번역한 일리아스 앞에서도 너무 낙담하지 않고 큭큭 웃어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출판사 사장님은 만족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고전을 읽는 독자 입장에선 정말 지 눈치 없는 번역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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