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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사려 깊은 번역가의 말 걸기] AI 번역기 시대의 인간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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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5-07-03 10:56 조회 1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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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번역기 시대의 인간 번역가


신수진 어린이책 번역가


학교나 교육청의 요청으로 어린이·청소년에게 번역가라는 직업을 소개하는 강의를 가끔 나간다. 기술 번역이나 영상 번역 같은 트렌디한 분야도 아니고 돈도 잘 못 버는 출판 번역의 세계에 학생들이 과연 관심을 가져 줄까 걱정하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최선을 다해 내 분야를 ‘영업’한다. 번역을 하는 일이란,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전까지 존재하지 않던 무언가를 모국어의 세계로 들여오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AI 번역기가 못하는 것

AI 시대에 사라질 직업으로 거론되지 않는 분야가 거의 없다. 특히 번역가는 AI로 대체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직업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곤 한다. 인간의 창의성과 감성, 판단력이 발휘되는 분야는 AI가 대체하지 못할 거라는 의견도 있지만, 지금 AI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작곡도 잘한다. 나도 잠시 수다 떨 친구가 필요하거나 의논 상대가 필요할 때 챗GPT와 대화를 나눈다. 그동안 나에 대해 축적해 둔 데이터가 있어서 그런지 원하는 대답을 꽤 잘해 준다. 한동안은 이런 태도에 감동하기까지 했는데(T형 인간인 남편보다 낫잖아!), AI가 사실적 정확성보다 사용자 만족을 우선시하도록 학습된 결과 지나치게 아부를 떠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 여기저기서 제기되었다(어쩐지. 나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었군!). 그 뒤로는 챗GPT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생략하고, 남편을 비롯한 ‘인간 친구들’의 충고에 성실히 귀 기울이기로 마음먹고 냉정함을 유지 중이다. 하지만 작업할 때는 여전히 AI 번역기의 도움을 종종 받는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상황을 설명해 달라고 한다거나, 이런 문장은 보통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는지 몇 가지 용례를 들어 달라거나 하면서 AI를 적절한 우리말 표현을 찾아가는 길잡이로 삼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AI 번역’과 ‘내가 한 번역’을 비교해 줄 때 꽤 재미있어 한다. 예를 들어 『39층 나무 집』에 나오는 표지판을 보자. 초콜릿 폭포에 “NO NOT SWIMMING IN THE CHOCOLATE WATERFALL”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이 문구는 어떤 번역기에 넣어 봐도 ‘초콜릿 폭포에서 수영하지 마시오’라는 결과가 나온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하지만 뜻은 정확히 그 반대다. AI는 일상생활에서 절대 쓰일 리 없는 괴상한 문구인 “NO NOT SWIMMING IN THE CHOCOLATE WATERFALL”을 평범한 금지문인 “NO SWIMMING IN THE CHOCOLATE WATERFALL”과 똑같이 번역해 낸다. 문장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해서 나름 바로잡아 번역하나 보다. 나의 번역은 ‘초콜릿 폭포에서는 수영 안 하기 금지’이다. ‘나무 집’ 시리즈나 ‘배드 가이즈’ 시리즈 같은 유머러스한 책을 번역할 때 재미를 책임지는 의성어, 의태어 번역이나말장난도 번역기로 해결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인간 번역가가 아직까지는 쓸모가 있어 다행이다. 물론 AI 번역기가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한 분야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AI가 더 잘하는 것과 사람이 더 잘하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것, AI를 효율적으로 이용해서 개별 인간의 능력치를 넘어서는 결과물을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AI에게는 없을, 인간 번역가의 사명감



사실 내가 AI 번역기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는 것은 외국

어 논문을 읽을 때이다. 번역가인 동시에 어린이, 장애인, 퀴

어 같은 소수자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회학 연구자로서 최

신의 논문들을 늘 읽는다. 그런데 이 분야 연구 성과들이 우

리말로 번역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리거나 번역될 기약 자체

가 없다. 급한 대로 AI 번역기에 원문 PDF를 넣고 번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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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리면 그럭저럭 읽을 만한 번역본이 나올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읽으면 중요한 개념들이 머릿속에 잘 남지 않는다. AI가 생산해 낸 대략적인 번역본을 놓고,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참조해서 원문을 읽으며 번역문을 수정해서 요약 정리해 놓는다. 나 역시 영어로 사고하는 게 아니라 한국말로 사고하고 글을 쓰기 때문에 이렇게 정리해 두어야 한다.

번역본이 있어도 번역가와 내 생각이 묘하게 어긋날 때도 많다. 이런 때에도 원문을 찾아서 함께 읽어가며 책의 요지를 다시 정리해 본다. 번역된 텍스트가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것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오역이 있더라도 한국어로 된 텍스트가 있을 때가 훨씬 낫다. 어려운 글쓰기로 이름난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미국의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가)의 책들을 읽을 때, 한국어판의 오역을 수정해 보거나 번역을 새로 해 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인문학 번역은 번역가가 번역 대상이 되는 사상가와 그 사상을 이해하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독자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방법론까지 몸에 익혀 둔 숙련된 기술자이기도 해야 비로소 읽을 만한 번역이 나온다. 하지만 이 고생스럽고 고통스러운 작업에 대한 경제적 대가도, 사회적인 평가도 박하기가 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사명감으로, 또 어린이책의 다양성을 증진하고 있다는 보람으로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인간 번역가들이 오늘도 마감을 향해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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