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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전읽기는 왜?]고전으로 삶의 강을 건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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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10-28 18:17 조회 7,08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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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인문학자, 『인문학은 밥이다』 저자
 
시카고대학의 사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명문대학으로 평가받고 있는 시카고대학교가 설립된 것은 1890년이다. 석유재벌 존 데이비슨 록펠러가 동부도 아닌 중북부인 시카고에 대학을 세웠을 때 주목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실제로 시카고대학은 1929년까지만 해도 둔재들이나 가는 3류 대학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해 부터 시카고대학은 미국의 유수한 대학으로 성장했다. 1929년부터 2000년까지 이 대학의 노벨상 수상자는 일흔 명 남짓 되었다.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을까?
이 변화를 이끈 주역은 바로 ‘시카고 플랜’과 로버트 허친스 총장이었다. 고작 서른 살의 나이에 총장이 된 허친스는 시카고대학을 통째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다. 그것은 바로 책, 특히 고전 읽기를 통해 학생들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대학을 성장시킬 근원적 힘은 바로 인문고전에서 온다고 확신하고,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인문고전 100권을 달달 욀 정도로 읽지 않으면 졸업시키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그의 선언이 처음부터 열띤 호응을 얻은 것은 아니다. 학생들의 저항은 완강했다. 도대체 그따위 것들을 읽어서 무엇에 써먹느냐는 비판이 가장 많았다. 지금 우리들의 풍토와 비슷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허친스는 끄떡도 하지 않았고 결국 학생들은 졸업하기 위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인문고전들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기도 했을 것이다. 어디 인문고전이라는 게 금세 그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냐 말이다. 게다가 1929년은 미국의 대공황이 시작된 시기였으니 한가롭게 그런 책을 읽는 게 내킬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허친스는 원전으로 고전 읽기뿐 아니라 수업 출석 의무제, 종합시험에 의한 학업평가까지 몰아붙였다. 이 전략은 이후 시카고대학이 이름을 떨칠 수 있는 지적 자양분으로 작용하게 된다. 처음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않았지만 학생들이 머리에 인이 박히도록 읽어댄 고전의 수가 30권, 50권을 넘어서자 점차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위대한 고전 저자들의 사고능력과 정신,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등을 겨냥한 허친스 총장의 ‘시카고 플랜’은 서서히 그 열매를 거뒀다. 결국 시카고대학의 힘은 바로 고전 읽기에서 나왔던 셈이다. 허친스의 교육철학은 그의 조력자이자 파트너였던 후임자인 몰트머 아들러에 의해 지속되었고 시카고대학의 힘이 완전히 구축되었다. 그게 고전의 힘과 매력이다.
 
청소년들이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지금 우리는 시카고 플랜을 그대로 따를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21세기 현실에 맞는 새로운 고전의 이해와 독서가 필요하다. 고전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그런데 나는 고전을 인간과 삶, 그리고 세상에 대한 보편적 가치를 대가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표현한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것은 텍스트로서의 답을 가르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다.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삶과 세상을 읽어 내는 시선을 보여줄 뿐이다. 그게 진짜 공부의 힘이고 교육의 가치이다. 삶의 강을 건너는 건 바로 나 자신의 힘이어야 한다. 힘들고 매운, 삶과 세상의 강을 건너는 섹시한 배가 바로 고전이다.
자기만의 배를 꿈꾸고 건조하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기이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똑같은 배를 누가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이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능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른바 수월성 교육이라는 망령이 21세기에도 횡행한다. 그러면서 청소년들에게 꿈도, 인생관도, 세계관도 마련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게다가 고전은 너무 묵직하고 너무 다양해서 도대체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도 모르거니와, 학교에서도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않는 까닭에 대부분 외면하고 만다. 그런 교육은 효율 좋은 로봇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자아를 발아시키지는 못한다.
최근 들어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에 ‘고전’과목이 추가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늘 그랬듯이 기계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거나 분석해서 학생들에게 또 하나의 짐을 지우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학생들이 고전을 하나의 ‘통째로의 지식 덩어리’나 ‘근엄한 지식의 훈장’쯤으로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고전을읽을 때 지식과 정보의 접근 방식이 아니라 대가의 눈으로 삶과 세상을 읽는 방식을 분유하고, 저자에게 질문하며 나름대로의 해법을 모색하는 길을 택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처음에는 불편하고 더디겠지만, 자신의 호흡과 눈으로 소화하지 못한 고전은 자칫 소화불량에 걸리거나 권위 의존적인 성향만 강화되기 쉽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제대로 고전을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시대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회적 상황을짚어 내며 읽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고전을 그저 문서로만 여기고, 문자로만 읽으면 자칫 독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우리의 삶과 사회에 대해 비교해 보면서 고전을 읽어야 고전이 나의 삶에 힘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회적 상황에 대한 기본적 탐구를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대단한 것도 아니다. 이미 학들은 교과서의 여러 과목들을 통해 상당히 많은 지식과 정보가 축적되어 있다. 하지만 시험 외에 사용하고 융합하는 방식을 훈련하지 않은 까닭에 따로 놀 뿐이다. 그리고 고전을 읽으면서 시간과 공간, 상황과 당대의 지식 체계 등을 파악한다면 교과서를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고전을 단순히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이해하고 맥락을 주체적으로 파악해 나가면 다른 분야들과 연계할 수 있는 능력이 배양되기 때문다. 학생들은 그러한 능력이 고등학교 과정뿐 아니라 대학생활과 사회에서의 활동에서도 매우 유익하게 작용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고전은 또 하나의 짐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거대한 창이며 동시에 학습의 능력까지 크게 성장시키는 발판이다. 고전을 단순히 오래된 ‘묵직한 옛 책’이라고 여기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어도 중요한 참고가 된다면 그것은 이미 고전의 지위를 획득한 것이다. 고전이 바로 최고의 부교재다! 청소년기에 고전을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은 결코 같지 않다. 더 이상 무엇을 말할 것인가!
 
왜 다시 고전인가?
우리는 그동안 산업화 시대의 그릇된 실용주의적 사고에 젖어 고전의 가치를 망각하거나 심지어 구박해 왔다. 그 결과 남이 만들어 놓은 건 잘 따라하고 주어진 명령과 매뉴얼은 금과옥조처럼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은 방기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가치, 세상을 주인으로 바라보는 눈, 내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생명력을 상실했다. 진정한 실용은 당장 지갑을 두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굽이굽이마다 의연하게 헤쳐나가는 의지와 지혜를 쌓는 것이다. 그걸 교과서나 베스트셀러에서 얻을 수 있을까? 물론 그것들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만 그 근원적 힘은 바로 고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난 산업화시대에 교육마저도 균질하고 수준 높은 노동 능력의 배양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 결과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삶은 경시되었고, 사람의 가치도 함몰되었다. 이제라도 그 가치를 되찾아야 한다. 사람의 가치, 삶에 대한 진정성, 세상을 읽어내는 지혜 등을 갖춰야 비로소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내가 가능해진다. 지금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읽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도덕감정론』 등을 제대로 읽어 봤다면, 천박하고 탐욕적인 자본주의가 횡행하여 인간의 가치마저 망가뜨리는 지금의 현실을 간과하거나 묵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신자유주의자들이 걸핏하면 애덤 스미스의 ‘시장의 자율성’을 운운하며 온갖 규제들을 풀어야 한다는 따위의 논리에 속수무책 당하고 있다. 고전은 결코 과거에 갇힌 것이 아니다. 애덤 스미스의 경제 이론을 제대로 읽어 보면, 그 참뜻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당대의 현실과 비교했을 때, 지금 우리의 처지에서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지 그 실천의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읽으라 하면서도 정작 아무도 읽지 않는 게 고전”이라거나, “제목은 알지만 읽지는 않는 책이 고전”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해학은 그저 웃음으로 넘길 이야기가 아니다. 고전을 제대로 읽으면 지금 그리고 미래의 우리 삶의 좌표가 보이고 강을 건널 방도와 힘이 마련된다. 그게 진짜 고전의 힘이고, 고전을 읽어야 하는 당위이다. 이것은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은 단순히 청소년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학부모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학부모들은 함께 고전을 읽으며 고민도 하고 성찰도 하며 때론 자녀들과 함께 토론하며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고전은 청소년용, 성인용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함께 읽고 생각하며 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만 좋으니 보라고 할 게 아니다. 책 읽는 부모의 모습을 보며 성장한 아이들의 학업성취도가 훨씬 높다는 건 여러 실증적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함께 읽는 고전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고전을 다루면서 그 점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할 생각이다.
옛것과 새것, 동양과 서양, 남성과 여성의 책들 그리고 소수의 국한된 분야가 아니라 다양하고 폭넓은 분야를 아우를 수 있는 고전을 함께 읽고 생각함으로써 우리의 삶과 세상, 그리고 나와 너의 연대를 깊게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저 단순한 교양이나 지적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고전에 대한 태도는 금세 고전을 다시 외면하게 만들 뿐이다. 삶으로 투사되지 않는 고전을 만들 것인가, 내 삶을 거대하게 움직이게 할 고전을 만들 것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달렸다. 자, 이제 함께 고전의 배를 타고 삶의 강을 건너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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