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독서 생태계를 살리는 도서정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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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06-29 16:14 조회 7,742회 댓글 0건본문
‘무늬만 도서정가제’의 폐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상품과 서비스에는 가 격이 있다. 공산품의 경우 생산비, 마케팅비, 유 통비, 판매 이윤 등이 반영된 최종 소비자 판매 가격을 소매상이 결정한다. 소매상은 유통 경로를 통해 받은 단가에 나름의 이윤을 붙여 판매 한다. 그래서 공산품의 가격은 소매상마다 천차 만별이다. 생산자는 가이드라인으로 소비자 권 장가, 가격 등을 제시한다. 하지만 최종 판매가 가 아니므로 정가(定價)라 부르지 않는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책값에는 원칙적으로(예외가 너무 많아서 원칙이라 부르기도 어렵지만) 정가 판매가 적용된다. 일반 공산품과 달리 생산자 (출판사)가 붙인 가격을 최종 소비자의 구매 가 격으로 삼는 수직적인 가격 구속 방식이다. 과거에는 정가 판매(재판매가격 유지행위)를 제한하는 공정거래법의 예외적인 적용에 의해, 2003 년 2월 27일부터는 현행 출판문화산업진흥법 (이하 ‘출판법’)의 도서정가제 규정에 의해 책값 가격 제도가 유지되어 왔다.
세 차례의 대폭 개정을 거친 현행법 규정은 발행 후 18개월 미만의 신간 도서에 대해 소비 자 판매 가격을 출판사가 정하고, 서점 등 판매 업체가 이를 준수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출판 법 제22조). 그러나 모법에서 엄연히 정가제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예외 조항이 너무 많아서 입 법 취지가 무색해진 상황이다.
즉 현행법에 의한 도서정가제에서는 법정 보 호기간인 18개월 미만 도서라도 정가의 10% 기 본 할인율에 마일리지 적용이 10% 추가되어 총 19%의 할인까지 가능하다. 또한 발행일로부터 18개월이 지난 구간과 실용서 및 초등 학습참고서는 아예 정가제 대상이 아니다. 실용서와 초 등 학습참고서는 공정거래위원회가 편집저작물 로서의 창작성과 예술성이 약하다는 해괴한 논리로 정가제를 없애는 순차적 일몰제 계획에 따 라 각각 2005년과 2007년부터 일방적으로 정 가 판매 대상에서 제외된 이래 출판법 개정 이 후에도 복권(復權)되지 못하고 있다. 또 국가기 관과 지방자치단체, 도서관, 사회복지시설, 군부 대 등에 파는 책에는 정가제 적용이 안 된다.
이렇게 정가제 적용 예외가 많다 보니 ‘무늬만 도서정가제’가 되어버렸다. 국내 최대급 매장 규모인 교보문고 광화문점이 확인한 바로는, 2012년 11월 13일 기준 국내도서 재고(번역서 포함 매 장 판매 도서) 약 43만 종 가운데 도서정가제 적용 대상은 12.8%에 불과했다. 이조차 19% 할인이 가능한 책이다. 이런 상황은 당초의 입법 취지는 없고 ‘도서 할인 촉진제도’라는 괴물이 출판시장을 지배하는 혼돈의 시대를 만들었다. 차라리 법이 없는 것보다 못한 유통질서 혼란과 가격 거품, 출판 산업의 절대 다수인 중소 출판사・서점 의 시장 퇴출을 초래하고 유통 지배력이 있는 할 인 판매업체(인터넷서점 및 오픈마켓)의 배만 불렸 을 뿐 저자, 출판・서점업계, 도서 구매자 모두를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거품 가격이 반영된 책값 을 할인한들 소비자에게 이익이 될 리 없다.
신간에 대한 명목상의 정가제 적용은 구간의 과당 할인 경쟁을 부르는 ‘풍선 효과’를 조장했 다. 50% 이상 할인은 물론이고, 심지어 1천원이 나 3천원 균일가 판매 등 도서정가제가 없는 나라보다도 더 심한 할인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할인율 높은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유사 사재기’ 논란도 불렀다. 구간 중심의 판 매 구조는 새로운 책의 출판을 감소, 억제시키는 역기능을 불렀다. 발행 종수는 정체 상태이고(2005년 43,598종 → 2013년 43,598종), 발행부수 는 매년 감소 추세이며(2005년 1억 1,972만 부 → 2013년 8,651만 부), 소비자의 책 구입은 갈수록 줄 고 있다. 통계청이 조사한 가계(가구) 월평균 도 서구입비는 2008년에 22,638원(단행본 구입비는 10,229원)이던 것이 2013년에 18,690원(단행본 구입비는 7,630원)으로, 학습참고서 등을 제외한 단 행본 구입비는 최근 5년 사이에 25.4% 감소했다. 그렇지 않아도 활자매체의 경쟁력이 위기인 디지털 영상매체 사회에서 할인판매 경쟁의 심화는 출판시장 질서를 더욱 교란시키고 책과 출판유통의 다양성을 대폭 약화시켰다.
우리나라에서 책은 부가세 10%가 면제되어 이미 10% 할인 효과가 있으며, 국민 세금이 투입 되는 무상의 각종 도서관 시스템 운영, 학교에서 의 독서교육과 신문・방송・잡지의 신간 안내 보 도, 독서문화진흥법의 존재 등 준공공재로서의 특징이 분명함에도 일반 공산품이나 소비재보다 도 더한 할인 경쟁이 벌어지면서 자본력이 취약 한 대다수 중소 출판사와 오프라인 서점의 존립 기반을 붕괴시켰다. 단적으로 1994년에 5,683개 이던 전국의 서점 수는 2013년에 1,625개로 무려 71.4%가 사라졌다. 인터넷서점의 높은 할인 율, 인터넷서점보다 공급 가격이 15% 안팎 높은 출판사의 공급률 차별을 견뎌낼 오프라인 서점 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인터넷서점에 서 책을 사서 파는 동네서점까지 등장했을까. 지역의 명망 있는 향토 서점들은 물론이고 대도시 유력 서점들까지 속수무책으로 폐업으로 내몰 리면서, 전국 읍면동(3,468개) 두 곳 중 한 곳에는 서점이 없다. 완전한 도서정가제가 있어도 수요 감소로 서점 경영이 어려운 마당에, 무한 할인 경쟁을 강제하는 현행의 구조에서 동네서점들이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은 몽상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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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안을 둘러싼 상황과 전망
2013년 1월 9일 민주통합당 최재천 의원이 출 판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개정안은 ‘공정거래법과 공정거래위원회에 의해 규율되는 현행 도서정가제 운용 방식의 폐지(독립된 도서정가제 특별 조항으로서의 위상 확립, 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의해 정가제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초등 학습참고서 및 실용서의 정가제 대상 포함)’, ‘발행 후 18개월 이내 (신간)에만 적용하던 정가제 대상을 18개월 이 후 도서(구간)로까지 확대하여 도서정가제 한시 적용 조항 삭제’, ‘직접 할인 이외에 마일리지, 할인쿠폰 제공 등을 포함한 총 할인율을 도서 정가의 10% 이내로 제한’, ‘도서정가제 적용 제 외 대상이던 도서관에도 정가로 판매하도록 한 다’는 내용이다.
개정안 발의 이후 인터넷서점 등의 반대 의견 이 표출되자 국회에서는 무책임하게 이해당사 자들에게 단일안을 요구했다. 단일안을 가져오면 여야 간에 이견 없이 통과시켜 주겠다는 것 이다. 그러나 신간 할인율을 둘러싼 온・오프라 인 서점 사이의 이견이 팽팽하여(오프라인 서점 은 개정안 지지, 인터넷서점은 현행 유지 주장, 즉 총 할 인율 10%와 19%의 대립) 논의의 진전을 이루지 못 하다가, 올해 들어 문화체육관광부가 중재에 나 선지 한 달여 만인 2월 25일 ‘도서정가제 확대 개정 법안을 위한 협약’이 전격 체결되었다. 출 판・서점 단체, 온・오프라인 서점, 소비자단체 등 총 9곳의 대리대표자가 서명한 합의 내용의 골자는 개정안을 대부분 수용하되 도서 할인율 을 정가의 15%(10% 이내의 직접 할인에 마일리지 등 을 포함한 총할인율) 이내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민간 합의안은 4월 또는 6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높고, 정부 공포를 거 쳐 6개월이 경과한 시점부터 시행될 것이다. 어렵게 합의된 정가제 규정이 적용되면 과당 할인 경쟁과 시장질서 혼란을 줄이는 등 일부 긍정적 효과가 있겠지만, 오프라인 서점의 도산 행렬과 15% 거품가격에 의한 소비자 피해 또한 확실할 전망이다. 판매량이 큰 신간 기준으로 보면 현행 규정에 비해 마일리지 4% 감축 이외에는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한 협약인 지, 법을 만들면서 질서를 혼탁하게 하는 세력 과 왜 협의를 하는지 모를 일이다.
‘15% 할인 도서정가제’가 도입될 경우, 학교 도서관 입장에서 달라지는 점은 이전의 최저입 찰제 방식 등과 달리 모든 책을 정가의 15% 총 할인율(직접 할인은 10%) 범위 내에서 구입해야 한다는 점이다. 도서관이 구입하는 도서도 도서 정가제의 적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도서의 평균 정가와 학교의 도서구입비 예산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가정할 경우 기존에 비해 구 입 가능한 장서량은 다소 줄어들게 될 것이다.
왜 도서정가제인가
도서정가제는 과도한 시장 경쟁에 의해 책의 가격 질서와 산업 가치 사슬이 무너지는 것을 막 기 위해 도입된 최소한의 제도적 기반이다. 그래 서 승자 독식이 아닌 저작–출판–유통 생태계 의 유지를 위해 문화 선진국들이 특별법 등으로 예외 없이 도입하고 있다. 글로벌 출판시장을 가 진 영어권(미국, 영국 등)을 제외한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 등 대다수 유럽 국가와 일본이 도서정가제를 철저히 시행함으로써 모국어의 지 식문화 생태계를 지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OECD에 가입한 선진국 중 영어권 국가와 출판 산업 수준이 미약한 나라를 제외하고, 과반수의 국가에서 도서정가제를 특별법 또는 공 정거래법에 의거해 시행중이다. 프랑스는 5% 이 내 할인만 허용하는데, 인터넷서점이 무료 배송 과 할인을 중복해서 못하도록 규제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백 부에서 수천 부 정도 발행하는, 거의 가내수공업 같은 발행 부수의 새 책이 1년에 약 5만 종 안팎 발행되어 지식과 문화 의 저수지 역할을 하는 다품종 소량 생산 구조이다. 이런 구조에서 도서정가제는 필수적이다.
도서정가제는 독자의 독서권(책 읽을 권리)을 보호한다. 소비재 상품처럼 지역과 여건에 따른 책값의 차이가 생기지 않도록 문화 공공재인 책 의 판매가를 전국 균일가로 한다. 우리나라에 서 유일하게 완전 정가제 상품인 신문의 경우도 민주주의 가치 창달에 기여하는 언론의 기능을 중시한 제도적 선택을 한 것이다
많은 소비자들이 오해하듯이, 도서정가제는 출판사나 서점의 밥그릇 챙기기인가? 소비자 입장에서는 정가제를 강화하면 구입가가 올라간 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정가제를 해도 출 판사가 적정 가격을 붙여 거품 가격 없이 판매 하면 할인한 것과 마찬가지 효과가 있고, 할인 판매제를 한다고 해도 가격을 부풀린 다음 명목 상 할인한다면 소비자의 실제 이익은 기대하기 어려운 속임수에 불과하다. 원래 1만 원 하면 될 책의 적정 가격을 2만 원으로 붙이고 50% 할인해서 팔면 소비자에게 이득인가? 모든 사업의 속성상 손해 보는 장사란 없다. 가격제도 여하 에 따라 실제 소비자 구입가에 큰 차이가 생길 가능성은 낮다는 말이다. 하지만 시장질서나 산 업 생태계는 정가제 유무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 다. 영미권을 필두로 정가제가 없는 나라들에서는 극소수 출판사에 의한 독과점 구조와 이익에 치중하는 상업출판, 비싼 책값 등으로 독자들에 게 이익보다 폐해가 훨씬 크다.
소수자들의 공존과 상생의 철학, 저자부터 독 자에 이르기까지 책을 둘러싼 경제적・문화적 가치사슬이 보다 울창해질 수 있도록 정가제에 대한 이해와 공감대가 필요하다. 일개 대기업의 한 달 매출액보다도 못한 소규모의 국내 출판시장에서 가격 경쟁이 다른 가치보다 우선하는 악 순환의 고리를 끊고 책과 독서의 생태계에 선순 환 구조가 정착되려면 완전한 도서정가제 이외 의 다른 선택지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