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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합니다! [세계의 십대와 함께 즐기는 문학] 허리케인에서 살아남은 열두 살 여자아이의 강인한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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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09-01 17:33 조회 6,42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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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29일 월요일 아침,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닥친 후, 뉴올리언스의 80퍼센트가 물에 잠겼고, 모든 공공 서비스가 파괴되거나 중단되었다. 해수면보다 지면이 낮은 이 지역을 두르고 있던 방파제와 둑이 터지면서 해안에서 밀려들어온 바닷물과 미시시피 강물이 범람하자 저지대의 나인스 워드는 며칠 동안이나 물에 잠겨 있어야 했다. 1,800명에 달하는 목숨을 앗아간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이어진 홍수로 패닉에 빠진 뉴올리언스는 재난 지역으로 선포되었지만, 공공서비스는 몇 개월 동안 복구되지 않았고 뿔뿔이 흩어졌던 수많은 이재민들은 아직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코레타 스콧 킹 명예상’을 받은 주얼 파커 로즈의 이 이야기는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책의 원제목 역시 그 어느 지역보다 심한 타격을 받은 가난한 동네 ‘나인스 워드’를 따서 그대로 쓰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핵심은 홍수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말로 하는 사랑이 아닌, 행동하는 사랑에 대한.



01 유령을 보는 두 여자

라네샤는 열두 살 생일을 얼마 전에 치렀다. 라네샤는 얼굴에 막을 뒤집어쓰고 태어난 아이, 상징과 암시를 알아보고 해석하는 아이, 미래의 엔지니어, 사랑으로 빛나는 여자아이이다. 하지만 학교 아이들은 아무도 라네샤와 같이 앉으려 하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도 라네샤를 꺼린다. ‘마녀의 씨앗’이라며 소곤거린다. 사실 동네 사람들은 라네샤를 거둬들여 키우고 있는 마마 야야를 두려워한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약초를 다룰 줄 알고, 미래도 볼 줄 아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마마 야야가 자신들에게 마법이라도 걸 줄 아는 마녀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영혼의 문을 지키는 아프리카 수호신이 새겨진 해골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여든두 살의 노파 마마 야야는 열두 해 전까지만 해도 동네에서 인기 있는 산파였다. 라네샤도 마마 야야가 받은 아이였다. 여자 아이를 낳다 죽은 젊은 여인을 대신해서, 라네샤를 키우고 있는 마마 야야는 사회보장연금으로 간신히 살고 있지만, 늘 밝고 긍정적이다.

이야기 전체의 신비스런 분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뉴올리언스 흑인들 사이에서 숭배되고 있는 부두교를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방 한쪽에 가톨릭의 성자와 부두교의 신을 함께 모셔두고 늘 기도하며 감각의 문을 열어두고 지내는 마마 야야를 문명의 시각으로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윌리엄 요르츠버그의 소설 『폴링 엔젤』을 바탕으로 만든 알란 파커 감독의 미스터리 영화 <엔젤 하트>에서도 나타나듯, 부두교는 숭고하다기보다 사악한 느낌을 자아낸다. 아프리카에서 발생하여 서인도 제도의 아이티를 통해 전파된 토속 종교가 문명국가 미국의 대중문화에서는 삿된 원시 종교로 왜곡되었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고 있는 뉴올리언스는 17세기 초반부터 지배하기 시작한 프랑스인들의 상부 문화와 부유한 백인들의 목화와 사탕수수 농장으로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들의 하급 문화가 뒤섞인 곳으로, 재즈와 블루스의 본향이기도 하다. 마마 야야가 방 한쪽 구석에 가톨릭의 성자와 부두교의 신을 함께 모셔둔 것도, 묵주 기도를 드리면서도 꿈을 통해 미래를 점치는 기묘한 캐릭터를 갖게 된 까닭도 그와 같은 풍토의 반영이지 단순히 개인적 특이성 탓만은 아닌 것이다.

흑인 여성 작가인 주얼 파커 로즈는 미국도서상을 받은 어른들을 위한 소설 『부두 드림』에서도 꿈을 통해 미래를 예언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여성 소외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녀는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재앙 문학 속에서 또 다시 ‘미치광이 라네샤, 귀신 보는 라네샤, 마녀 라네샤’로 손가락질을 당하는 열두 살 소녀와, “때가 무르익으면, 온 우주가 사랑으로 빛난단다.”라고 조언하며, 세상 만물에 숨겨진 암호를 주의 깊게 살펴 드러난 것 이상의 뭔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길잡이를 해주는 노파 마마 야야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자신이 당장 겪고 있는 가난과 주변의 몰이해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한 라네샤는 수학적인 상징과 기호로 상상하길 좋아하고 장차 다리를 설계하고 싶어 하는 꿈 많은 소녀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 아프리카와 신대륙, 전통과 혁신, 미신과 과학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것이 다리의 역할이라 할 때, 마마 야야야말로 재앙 전후를, 생과 사를, 꿈과 현실을 이어준 상징적 다리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두 번째 심층 층위에서 이 이야기는 유령을 볼 줄 아는 매우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일흔 살 차이가 나는 두 여인의 세대를 이어준 ‘사랑과 강인함’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02 홍수 신화와 무지개
잠시 신화적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쉬 신화’, 구약 성경의 ‘노아의 방주’를 비롯하여 우리네의 ‘달래내 고개’ 전설 이야기 등은 모두 홍수와 관련된 옛이야기들이다. 허리케인 ‘벳시’의 상처를 온전히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몇 년 뒤에 다시 겪은 카트리나의 위력은 저지대의 침수와 바닷물과 강물의 역류에서 비롯된 홍수로 괴물처럼 커졌다. 빠른 속도로 수위를 높여가는 물을 피하기 위해 다락방으로 올라가야만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마마 야야와 라네샤의 대화는 노아의 방주로 옮아간다. 성경이 암시하는 대로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인간에 대한 신의 분노가 홍수의 원인이라는 라네샤의 생각과 달리, ‘홍수는 그저 홍수일 뿐’이라고 대꾸하는 마마 야야는, “홍수가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어떻게 끝나느냐, 중요한 건 그거야.”라는 나름의 신화적 해석을 덧붙인다. 전 세계에 광포하는 홍수신화를 분석한 신화학자들 역시, 홍수 신화의 고갱이는 땅이 마른 후 살아남은 남녀의 사랑과 그 애정 행위를 통한, ‘카오스의 세상에서 코스모스 세상으로의 이행’이라고 보는 데 합의한 바 있다. 마마 야야는 2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약혼자로부터 받은 목걸이를 라네샤에게 넘겨주면서, 홍수가 지나간 자리에 뜰 무지개처럼 온 우주를 빛내줄 ‘사랑’을 역설한다. 이름에서도 유추되듯, 초인간적인 존재로도 그려진 마마 야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간파하고, 죽음을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역시, 그녀가 받은 사내아이였던, 라네샤와 동갑내기인 타숀이 하필이면 허리케인의 눈에 갇힌 마마 야야의 집을 찾아온 서사적 장치는 어느 정도 이 이야기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유사하게 전해지고 있는 홍수 신화를 바탕에 두고 있음을 넌지시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숫자의 상징을 믿는 마마 야야의 말처럼 육손이로 태어난 타숀은 ‘생명을 강하게 움켜질 강인한 의지를 지닌’ 선택받은 사내아이이다. 마마 야야의 육신을 집어 삼킨 물이 다락방 꼭대기까지 차올랐을 때, 라네샤는 타숀과 지붕 위로 올라간다. 시커먼 강물로 떠다니는 시체와 자동차와 야생동물들을 보고 둘은 희망을 잠시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밤이 되고 아침이 찾아오고 다시 밤이 되는 동안에도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고자 하는 의지를 버리지 않는다. 쫄쫄 굶으며 기다려도 구조대가 찾아와주지 않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둘은 얼마 뒤 물 위에 떠 있는 배를 발견하지만, 수영도 할 줄 모르기에 배를 끌어당길 방도를 모색하다, 절박하게 하늘에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마치 우리 민담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동아줄을 내려달라고 기도했던 오누이처럼.

마마 야야는 무지개를 다시는 홍수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신의 약속으로 빗댄다. 몇몇 신화에서 무지개는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이고 신들이 다니는 천상과 지상 사이의 통로이다. 이야기의 말미에 구조된 라네샤와 타숀이 떠오르지 않은 무지개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무지개 신화를 믿었던 라네샤의 눈에 홍수를 다시 일으키지 않겠다는 신의 약속은 보이질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수를 이겨낸 소녀는 비가시적이지만 존재하는 무지개의 상징을 해독해낸다. 다시 세 번째 심층 차원에서 이 이야기는 홍수 신화의 서사 구조를 빌려, 사랑이 잉태한 희망을 새롭게 들려주는 전설로 거듭난다.


03 보이지 않는 탯줄
젖먹이 시절부터 담담하게 유령들을 지켜봐온 라네샤는 말없이 마마 야야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엄마의 유령이 늘 자신을 지켜주고 있음을 잘 알고있다. 사람이 죽어 흙 속에 갇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 마마 야야는 떠나지 못하고 라네샤 주위를 맴도는 엄마에 대해 이렇게 말해준다. “네 엄마는 너를 사랑해. 맞아. 아직도 너를 낳으려 하고 있으니…… 네 엄마는 네가 혼자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싶어 해.”라고. 현명한 마마 야야의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막연할 뿐이다. 거대한 사건, 즉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홍수 사건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전까지, 독자의 입장에서 모든 진실은 아직 보이지 않는 물속에 잠겨 있는 것만 같다. 라네샤를 낳다가 목숨을 잃은 엄마가 아직도 라네샤를 낳으려 하고 있다니?

죽은 여인이, 아무리 한이 맺혀있더라도, 유령이 아이를 낳고자 욕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홍수를 겪으면서, 라네샤의 탯줄을 잘라주고 라네샤의 육신과 영혼을 돌봐주던 마마 야야가 오히려 어린애가 되어 라네샤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며칠간을 통해, 모호했던 이 표현은 선명한 의미를 갖추게 된다. 이야기의 말미에서 마마 야야의 시신이 잠긴 검은 흙탕물은 무엇이든 집어삼킬 듯 무시무시하다. 죽음의 공포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수면 위로 떠오른 버드나무 가지를 발견하고 그 줄기를 찾아 스스로 물속으로 뛰어든 라네샤는 바로 그곳에서 엄마의 유령을 만나고 도움을 받는다. 라네샤가 혼자 힘으로 역경에 맞서는 강인한 여인이 된 걸 확인한 엄마의 유령은 라네샤의 발목에 묶인 나무뿌리들을 떼어 내주고 물 위로 라네샤를 밀어 올려준다. 이 행위야말로 산모가 양수 밖으로 아이를 밀어내는 엄숙한 순간을 은유한다고 볼 수 있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독자들은 다시 ‘너(라네샤)를 낳으려 하는’ 엄마 유령의 욕망이 라네샤의 정신적인 성숙을 바라는 루이지애나 출신 여인들의 집단 소망의 함축된 상징임을 깨닫게 된다. 죽음-공포를 연상시키던 재앙의 물이 재생과 부활의 생명수로 변모되었다. 이처럼 극한의 시련을 통해 라네샤는 영적으로 거듭나고 강인한 여인으로의 부활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홍수로 이어진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마마 야야의 지적처럼 신을 섬기지 않은 인간들에 대한 신의 분노로 발생하지 않았다. 알고 보면, 상업용 선박들을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해상 지름길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또한 재앙 발생지 내에서 발발 가능한 무질서에 대한 공포, 이 지역 빈민들과 소수자 그리고 이민자들에 대한 두려움, 약탈과 경제범죄에 대한 고정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엘리트 집단의 패닉 증세가 온갖 흉흉한 소문을 생산해내며 복구활동을 무한정 지연하는 동안, 분노한 착한 사마리아인들이 미 전역에서 몰려들어 직접 복구 작업에 나섰다. 마마 야야의 표현대로 ‘홍수는 그냥 홍수일 뿐’이지만, 나인스 워드를 물바다로 만들었던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새로운 유대의 계기를 낳았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사랑, 유대를 가능하게 해주는 인간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04 폐허를 응시하라

2005년 8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덮쳤을 때 피신을 갈 돈도 없고, 운전은 해 본 적도 없고, 차도 없는 마마 야야와 라네샤와 같은 이들이 많았다. 이들 대부분은 노인이거나 병자, 혹은 생계 보조 수단에 의존해 살고 있는 가난한 약자들이었다. 한편 사건이 터졌을 때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타손처럼 슈퍼돔으로 피신을 갔던 사람들은 자신들을 방치한 채로 내버려두고, 서로를 강간하고 살해한다는 흉흉한 소문을 퍼트린 언론에 분노를 느끼고 흥분했다. 실제 막심한 피해를 입은 나인스 워드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나의 아름다운 열두 살』은 단순히 홍수에서 살아남은 소녀에 대한 흥미진진한 무용담이 아니다. 프랑스계 혈통의 아리따운 아가씨가 가난한 나인스 워드 흑인 청년과 맺은 금단의 사랑. 바로 그 사랑으로 잉태된 비극이 라네샤의 사랑과 용기로 인해 새롭게 정의 내려지게 된 이야기의 초반 부분을 다시 읽어본다. “셰익스피어의 책을 읽다 보면 ‘신의 장난’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건 정말로 신이 장난을 쳤다는 게 아니라 ‘운명적’이라는 뜻이다.”라는 부분을. 자연 재앙이 운명적으로 닥칠 때가 있다. 송두리째 생활의 터전을 앗아가는 자연의 힘 앞에서 우리 인간은 감히 ‘신의 장난’을 운운할 수 없다. “사랑은 행동으로 보여 주는 거란다.”라고, 마마 야야는 늘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단과 용기와 보살핌이 필요하단 걸 어린 라네샤가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그저 잘 쓰여진 ‘재난 유토피아’ 서사가 아니다. 라네샤는 운명적으로 겪어야 할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대비한다. 어른이 되기 위해 주변을 안전하게 돌볼 결심도 한다. 그래야 안식하지 못한 엄마의 유령을 달랠 수 있음을 안다. 그래야 마마 야야의 조건 없는 사랑에 보답할 수 있음을 안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잘 견뎌 내리란 것을 알 만큼 훌쩍 성장해버린, 홍수에서 새로 태어난 용감한 여자 아이가 들려주는 사랑의 이야기로 수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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