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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합니다! [세계의 십대와 함께 즐기는 문학] 이상한 말들의 나라 ‘루타바가’에서는 말도 안 되는일이 매일매일 일어났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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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07-24 18:13 조회 6,987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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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욱 번역가. 작가

그림형제가 말했다. “인간의 상상력은 동화를 통해서 모든 제한을 자를 수 있는 커다란 칼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켜준다.”라고. 이때 ‘동화’는 소위 말하는 어린이들의 독서물이란 협의에서 벗어나 있다. 곤고한 현실 세계에서부터 벗어나고픈 욕망이 강렬해질수록, 어른들도 자신만의 상상 세계에 몰입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좀 더 지쳐있거나 좀 더 창의적이라면, 아예 말을 갓 배우는 아이들처럼 기존에 알고 있던 사물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만의 이름을 붙여보기도 한다. 아직 한글을 모르는 <아빠 어디가>의 준수처럼. 필자의 눈에는 준수의 엉뚱한 상상놀이 그리고 작명법이 각별하다. 또한 사회적으로 약속된 사물의 이름이 퍼뜩 떠오르지 않아서 지시대명사 활용이 늘어가는 칠순 엄마를 보고 있자면, 답답한 마음 한편으로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어린이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참에 약속한다. 언젠가 반드시 3세에서 103세가 함께 즐기는 동화를 쓸 것을 공개적으로 다짐한다.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말을 배우는 손녀가 각각 지은 이름으로 사물을 지시하고 소통하더라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따뜻한 동화를 말이다.



01 두말하면 잔소리
1872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수학교수 찰스 도지슨(Charles Lutwidge Dodgson)은 루이스 캐럴이란 필명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이어 동화책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펴냈다. 험프티와 덤프티가 등장하는 이 책에는 현존하는 넌센스 시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받은 「재버워키」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이 시의 가장 큰 매력은 루이스 캐럴을 빼고 아무도 뭔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래도 괜찮을까? 상관없다. 어차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나 임의로 합성된 단어들로 지은 ‘부조리시’니까. 오히려 제대로 안다고 우겨대는 사람을 허풍쟁이로 폭로해주니까. 시인 A. 세제르(Aimé Fernand David Césaire)는 넌센스의 존재 이유가 위정자들의 언어를 파괴하는 데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런 시를 감상할 때는 적당히 모르는 척하는 센스도 필요하다.

아무튼 논리와 상식으로는 통하지 않는 단어와 문장 앞에서 우리 어른들은 쩔쩔 맨다. 칼 샌드버그 역시 따지기 좋아하는 독자들을 이해시키기를 애초에 포기하고 『루타바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루타바가 나라를 여행하는 독자들은 삼단논법이니 변증법을 잊어야 국경을 통과할 수 있다. 그나저나, 1922년에 초판이 발행된 이 얼토당토않은 황당한 이야기를 꼭 읽어야 하는 까닭은? 어린이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낄낄거리며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넌센스는 세계 어디에나 있다. 심각한 세제르의 시에도 유쾌한 닥터 수스의 동화책 속에도 있고, 어처구니없는 만화 <스폰지밥>에도 기발한 광고 문안에도 있다. 넌센스는 논리를 거부하며 출발하여, 기존 가치들을 전복한다. 넌센스는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읽어내고, 독자적인 언어로 세상을 해석해낸다. 아쉽게도 우리 문학에서 넌센스는 무시되거나 간과되어 왔다. 엄중한 문학적 권위가 지배적인 풍토 속에서 우스갯소리나 ‘찍찍’ 내뱉는 것처럼 얼핏 보이는 넌센스로 가득한 아동문학은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무엇보다 아동문학에서 소중한 덕목인 ‘재미’가 ‘문학적’이어야 하고 ‘교육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에 의해 홀대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위대한 넌센스 판타지 동화 『루타바가 이야기』는 퓰리처상 수상 시인이자 전기 작가이자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이기도 했던 칼 샌드버그에 의해 창작되었다. 『시카고 시편』으로 이미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린 이 위대한 시인은 자신의 세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짤막짤막한 이야기 25편을 가상의 나라 루타바가를 배경으로 풀어냈다. 루타바가(Rootabaga)는 옥스퍼드 사전에도 구글 지도에도 없다. 대신 발음이 같지만 철자가 다른 ‘Rutabaga’가 온라인 사전에서 참고 단어로 추천된다. 그 뜻은 ’큼지막하고 노르스름한 스웨덴산 순무‘이다. 그렇다고 샌드버그가 순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니다. 더더구나 그의 선조들이 살았던 스웨덴(그의 부모님은 스웨덴에서 미국으로 이민 왔다)의 전설을 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줄거리는? 뒤죽박죽이라 논리정연하게 말할 수 없다.


02 혀 꼬이는 말과 기가 찬 이야기
전통적인 동화와 달라도 한참 다르고, 요즘 동화와도 무척 다르다. 루타바가 나라에서 기찻길은 삐뚤삐뚤하고, 돼지들은 턱받이를 한다. 루타바가에서 가장 큰 도시는 ‘양파와 간’이란 곳이고, 슈크림 마을은 마을 광장 한가운데 있는 둥근 집 실패 기둥에 감겨 있던 줄이 바람에 풀리면서 두둥실 하늘로 떠오른다. 누더기 인형이 빗자루와 결혼도 하고, 마주한 두 건물이 연애를 해서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그 아이는 부모의 바람대로 기차로 태어나 세상을 주유한다. 아니, 어떻게 그런 발칙한 상상을? 칼 샌드버그의 상상력은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드의 그것에 버금간다. 루이스 캐럴이 어느 햇살 찬란한 오후에 만난 꼬마 아가씨 앨리스를 위해 기꺼이 이야기꾼이 되었고, 세헤라자드가 여인들의 목숨을 살릴 요량으로 마지못해 페르시아 왕의 아내가 되어, 훗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을 그들의 아이들을 위해서까지 수많은 이야기를 짜냈다면, 칼 샌드버그는 치유 불가능한 간질병에 걸린 큰 딸 마가렛을 위해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이야기를 지어냈다. 그의 이야기는 기상천외하지만, 악마도, 마녀도, 죽음도 존재하지 않는 따뜻한 이야기로서, 강력한 치유의 힘을 갖는다. 우선은 세 딸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혀 꼬이는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동시적인 운율이 느껴지는 단어들을 고안해 낸 직접적 동기였겠지만, 1차 세계 대전 후의 침울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던 어른들에게도 작은 위안이나마 건네고픈 열망이 그로 하여금 능청과 딴청을 부리게 했을 테다.

도끼줘 씨는 아이들이 말하는 법을 배우자마자 내뱉는 첫말로 애들 이름을 삼았다. 그렇게 해서 첫 번째 남자애는 ‘제발줘’가 되었고, 첫 번째 여자애는 ‘묻지말아줘’가 되었다. “도끼줘 씨는 자신의 장남이자 막내아들이자 외동아들인 제발줘와, 자신의 장녀이자 막내딸이자 외동딸인 묻지말아줘를 데리고 기차역으로 갔다.” 문장은 이런 식으로 기술된다. 그리고 이들이 모든 재산을 탈탈 털어 루타바가 나라로 가는 기차표를 구하는 데에서 본격적인 『루타바가 이야기』가 시작된다. 잠시 인용한 위 문장을 다시 보자. 단어 차원에서 말장난처럼 논리를 비틀었지만, 오히려 지시하고 있는 대상의 정체는 자명해진 셈이다. 넌센스는 문학의 한 장르가 아닌 문학적 기법이다. 역설과 혼동을 통해 익숙한 단어의 의미를 낯설게 만드는 기법이다. 칼 샌드버그는 『루타바가 이야기』에서 다양한 넌센스 기법을 실험하고 있지만, 어린이의 눈높이로 보면 마냥 어려운 것만도 아니다. 말장난의 유희 속에서 언어의 의미와 쓰임을 배우는 아이들의 특성이 배려된 샌드버그 식의 넌센스 작풍은 특히 이름 짓기에서 도드라진다. 이를테면 루타바가 왕의 게으른 외동딸 이름은 ‘수전 게을러터진스트’이다. 물론 번역자 김난령의 빼어난 이중 언어 감각이 개입된 역어 선택이다. 심지어는 ‘웩이랙, 두두쟁이, 비더비스터, 글래디윙어, 부블루나무’ 등 오로지 루타바가 나라에만 서식한다는 듣도 보도 못한 동식물들도 떼로 등장한다. 이들을 상상하는 것부터가 번역자의 입장을 난처하게 했을 테다. 고백컨대, 이에 상응하는 우리말을 떠올리고 바꿔 주는 작업 과정에서 ‘루타바가 사전’이라도 있어줬음 싶은 게, 이 책을 홀로 번역해본 필자의 심정이기도 했다.


03 익살스럽지만 말 되는 말, 아름다우면서도 심오한 말
넌센스, 한 마디로 센스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영어에서 ‘메이크 센스(make sense)’는 ‘이해하다’, ‘의미가 통하다’란 뜻으로 쓰인다. 샌드버그는 어린이 시기를 가리켜 어휘와 문장의 무정부주의 상태라고 표현한 바 있다. 사실 그가 『루타바가 이야기』에 들인 공은 한 권으로 그치지 않았다. (루타바가 이야기–『루타바가 비둘기』와 『드문 감자 얼굴』로도 이어짐.) 샌드버그는 이야기를 무기 삼아 아이들을 교화하려는 목적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관용적인 작가였다. 그는 어린이문학이 도덕적 교훈주의의 도구로 활용되는 걸 스스로 경계했다. 그래서인지 각 편의 종지부는 거의 농담조로 끝난다. 종종 잘 짜인 플롯을 기대하는 독자의 지평이 깨어지기도 하고,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의미 없는 경우 역시 허다하고, 갈등은 해결되지 못한 채로 어정쩡하게 남겨진다. 하지만 아이들은 키득거리길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이 아이들을 열렬한 루타바가 팬으로 만든 매력은 무엇일까? 다음 인용을 살펴보자.

빵긋, 쌩긋, 쨍긋이 말했어요.
“스누푸한테는 삐뚜름한 모자를 똑바로 씌워야 해.”
뻥긋, 씽긋, 찡긋이 말했어요.
“아냐. 스누푸는 똑바른 모자를 삐뚜름하게 쓰길 원해.”
빵긋과 뺑긋은 티격태격, 쌩긋과 씽긋은 옥신각신, 쨍긋과 찡긋은 누가 옮으니 그르니 하며 싸웠어요. (중략)

일반적인 동화에서 결론은 합리적이고 보편적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나 사태에서든 칼 샌드버그 식 결론은 장난스럽고 익살맞다. 여섯 아이들이 두 패로 나눠 모자 씌우기를 놓고 결론을 맺는 방식 역시 서로의 눈을 똑바로 보고 ‘씩’ 웃어주는 행위와 병행된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모자 두 개를 씌우자. 삐뚜름한 모자는 삐뚜름하게, 똑바른 모자는 똑바르게.”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내린 기발한 합의에 대만족이지만, 어른 독자의 입장에서는 갸우뚱하게 된다. 바로 이 낯선 결정들이야말로 상식으로 굳어진 머리로는 이해가 쉽지 않은 대목이다. 논리를 따져 묻는 어른들까지 이해해주기를 애초에 포기한 샌드버그는 합리적 결정을 내렸다고 자족하는 어른들 세계의 논리라는 잣대야말로 실은 권력 투쟁에서 이긴 자들의 허울 좋은 변명거리라는 점을 웃으며 조롱하고 있다. 아무리 논리를 추구한들, 인간의 판단은 논리를 따르기보다 비논리의 범주에 드는 감정과 분위기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걸 전쟁을 통해 몸소 겪은 작가는 서정성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이야기꾼이기에 앞서 시인인 샌드버그의 『루타바가 이야기』에는 아름다운 묘사로 환상적인 정경을 그려낸 장면들 역시 충분히 많다. 가령 “하늘이 땅 가까이로 내려오는 1월이면, 우리는 이따금씩 시골 길을 걸으면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요. 그런 1월의 밤에는 때때로 별들이 숫자처럼 보인답니다.”와 같은 겨울밤을 옮겨 놓은 표현을 통해 우리는 그가 본디 시인임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04 살아 있는 말을 찾아 떠나는 여행
지도에도 없는 루타바가 나라에 가려면 일단 『루타바가 이야기』를 구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그 책은 우리말로 번역되어 서점에 꽂혀있다. 소문에 의하면 루타바가는 기회의 나라이다. 그곳에서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정해놓은 언어 규칙대로 따라 하지 않을 권리를 찾을 수 있고, 동행한 어른들도 지금껏 익힌다고 고생했던 단어와 적절한 용례들을 까먹고 선뜻 기억해내지 못한다고 해서 이들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곳이다. 그곳에 가면 언어의 감옥에 갇혔던 말들조차 해방되어,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다. 거기에 가면 모두가 행복해진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견고한 언어의 성벽에 둘러싸여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조차 이해할 수 없다. 언어는 약속된 상징들이다. 한 언어가 공식적으로 유통되는 체계 내에서, 하나의 사물을 지시하는 고유한 단어가 바뀔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 시인이자 동화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자 역사학자인 칼 샌드버그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루타바가 나라로 가보라고 한다. 그럼 알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양, ‘씩’ 웃고 있다. 그러나 그곳은 지도에도 없는 유토피아이다. 그 어떤 인간의 언어로도 포획될 수 없던 무의식들이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들어가고 있는 판타지의 세계이다. ‘루타바가 나라가 유토피아(utopia)라고요? 그럼 갈 수 없잖아요?’ 물론이다. 유토피아는 이상향이니까, 실재하지 않아야 맞다. 하지만 우리가 가려하는 루타바가 나라와 달리 유토피아는 구글 지도에 잡힌다. 말장난이 아니다. 필자의 말이 믿기 어려우면, 직접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한 마디만 더! ‘유토피아’야말로 ‘넌센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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