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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합니다! 오늘 우리의 사.랑.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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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16 22:40 조회 5,927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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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가 가사를 유심히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요즘은 아이돌, 그것도 걸그룹이 대세라지만 대부분의 유행가는 ‘사랑’을 노래합니다. 아이돌 그룹 멤버 중에는 미성년자들도 많은데 어쩜 그렇게 맛깔스럽게 사랑을 노래하는지, 중년(?)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사랑을 온전히 이해 못하는 저로서는 신기하기만 합니다. 아무튼 사랑은 남녀노소, 동서고금을 떠나 모든 인간의 주요 관심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언젠가 대문호 괴테가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영혼만이 행복하다”라고요. 테레사수녀님은 “유일한 치유는 사랑이다”라고까지 하셨죠. 사랑에 관한 명언을 열거하자면 아마도 끝도 없을 겁니다. 그만큼 사랑은 우리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아니 사랑 그 자체가 인간 삶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또 내일도 사랑은 인간의 삶과 역사를 추동한 진정한 힘인 셈입니다.

사랑, 생명을 일으키는 색다른열정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흔히 우리는 ‘사랑’하면 남녀 간의 사랑을 떠올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요즘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젊은 세대를 일러 ‘3포 세대’라고 부르곤 합니다. 각박한 현실을 이겨내기 힘들어 연애와 결혼, 육아를 포기한 세대라는 것이죠. 사랑에 눈 뜨고 알아가는 가장 중요한 시기,그 사랑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장밋빛 나날을 꿈꿔도 모자란 세대에게 너무도 가혹한 이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럴수록 “사랑하는 영혼은 행복하다”는 괴테의 말이 절실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저는 춘향을 생각해보았습니다.

혹시 영화 『방자전』을 보셨는지요. 몽룡과 춘향, 방자와 향단, 심지어 변학도까지도 제각각의 사랑을 꿈꿉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몽룡은 지고지순한 사랑의 대명사인데, 영화에 등장하는 몽룡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해 사랑을 이용하는 교활한 인물입니다. 또 영화 내내 변사또는 어그러진사랑, 즉 육체적 탐닉만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조선시대 양반들의 일탈적 인식을 대변합니다. 오직 방자만이 시간이 흐를수록 사랑의 참 의미를 알아가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냅니다.

고전古典이자 고전古傳 『춘향전』은 사실 몽룡과 춘향의 애절한 ‘사랑’만을 키워드로 읽기에는 불편한 작품입니다. 『춘향전』에는 당대의 지배구조를 강화하려는 권력층의 복선이 깔려 있기도 하고, 기어이 신분상승을 이루어야만 하는 하층민들의 절박한 질고가 담겨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복선과 해석을 내려놓고 다시금 순수한 마음으로 『춘향전』을 읽어보는 것도, 요즘처럼 뒤틀린 사랑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듯합니다.

『춘향전』으로 우리네 사랑을 읽다가 문득 떠오른 책은 쥘 미슐레의 『여자의 사랑』입니다.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역사학자요, 정치적으로는 공화주의자였던 쥘 미슐레는 “진실한 사랑을 통한 정신의 해방”을 역설합니다. 그 중요한 통로가 여자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었죠. 쥘 미슐레는 “여자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라는 믿음 아래 여자의 사랑이 인류의 삶에 가져다 준 혜택을 유려한 필치로 그려냅니다.

쥘 미슐레는 사랑은 “우리의 생명을 주고, 또 거듭나도록 자양을 주는 아주 색다른 열정”이라고 말합니다. 『춘향전』을 읽다가 『여자의 사랑』이 떠오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온갖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해석을 완전히 배제한 『춘향전』은 『여자의 사랑』에서 쥘 미슐레가 말한 것처럼 몽룡과 춘향에게, 아니 진실한 사랑을 일궈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거듭나도록 자양을 주는 색다른 열정을 선사합니다.

에리히 프롬과 장자, 사랑을 논하다
사랑에 관한 고전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이야기합니다. 프롬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의 사랑에 대해 『사랑의 기술』을 통해 예의 그 해박한 지식을 풀어놓습니다. 그는 사랑을 신앙과도 같은 위치에 놓고 이해하는데 “사회적 현상의 사랑의 가능성에 신앙을 갖는 것은, 인간의 본성 그 자체에 대한 통찰을 기초로 하는 합리적 신앙”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프롬이 말한 신앙과도 같은 사랑을 갖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 노력이 필요합니다. 프롬은 각 개인이 고유의 정체성 전체를 발달시켜 생산적 방향으로 나가지 않으면 아무리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반드시 실패한다고 말합니다. 아울러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이 없는 한, 또한 참된 겸손, 용기, 신념 훈련이 없는 한 개인적인 사랑도 성공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만큼 사랑은 다차원적인 것이며, 인간의 의지나 지혜가 쉽사리 규정할 수 있는 평범한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게 되려면 최고의 위치에 놓여야 한다”는 프롬의 말마따나 사랑은 인간 삶의 지고지순한 가치이며 위대한 명제인 것입니다.

조금 생뚱맞지만 이 대목에서 천千의 얼굴을 가진 고전 『장자』 이야기를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연대를 달리하는 복수 저자의 집단 창작물인 『장자』가 사랑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요. 물론 『장자』 어디에서도 ‘사랑’ 타령을 하는 곳은 없습니다.

하지만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였던 중국의 전국시대는 동양 철학, 나아가 동서양을 아우르는 모든 철학과 사상이 등장했던 시기입니다. 자연과 인간, 주체와 타자, 언어와 소통, 실재와 몸 등 현대 철학이 탐구하는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 『장자』인 것입니다. 결국 에리히 프롬이 말한 사랑, 즉 “최고의 위치”에 도달해야만 가능한 ‘사랑’이라는 명제는 『장자』가 추구하는 핵심적인 사상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 파우스트』와 『오만과 편견』 속에 담긴 사랑의 의미
요한 볼프강 괴테의 『파우스트』. 명작 중 명작이요, 심오한 사상과 철학의 집합체이지만 그만큼 난해해 읽어본 이가 많지 않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우주의 신비를 파헤치고 인생 최고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악마와 거래한 파우스트는, 악마를 종으로 부리며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쾌락을 탐닉하지만 종국에는 어떤 만족도 얻지 못하고 지옥으로 향합니다.

사실 『파우스트』는 의지적으로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대입해 읽어야 하는 작품입니다. 『파우스트』에서 괴테는 인간 파우스트의 비극적 운명을 통해 인간이라면 겪을 수밖에 없는 사랑과 증오, 성과 속, 이기심과 희생의지 등 다채로우면서도 이중적인 인간적 면모를 고발합니다. 이는 모든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확장시키기를 바라는 괴테의 작가적 의지가 담긴 것입니다. 종교를 초월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획득해야 하는 ‘구원’의 비밀을 『파우스트』를 통해 ‘사랑’이라는 보이지 않은 의미로 담아낸 것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가 의지적으로 ‘사랑’을 대비시켜야 한다면, 동시대를 살았던 작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작품 그 자체가 사랑에 관한 오마주입니다. 사랑은 때론 눈을 멀게 하는 묘약과도 같지만, 때로는 보이는 인상이 주는 편견으로 인해 커다란 시련을 겪기도 합니다. 특히 내면을 쉽사리 읽어낼 수 없는 사람일수록 ‘오만’의 멍에를 져야하기 때문에 사랑은 그 자체로 장벽이 될 때가 많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첫인상은 중요합니다. 그것이 결국 한 인간의 내면이요 자화상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의 편견은 때로 오만 뒤에 숨은 진정한 사랑과 자아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이끌기도 합니다. 『오만과 편견』이 말하는 사랑은 너그럽고 사려 깊은 마음, 즉 믿음이며 존경입니다. 결국 사랑은 오만과 편견을 뛰어넘는 절대적 아름다움인 것을 제인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을 통해 에둘러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 사랑’이라는 진리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쓰고 수많은 의미로 해석합니다. 저마다에게 사랑은 의미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가끔 읽는 『성서』에서 사랑이라는 마음 자세가 갖추어야 할 행동 지침을 보면서 ‘깜놀’했습니다. 우선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어찌 보면 『성서』가 말하는 사랑은 ‘금기’처럼 보입니다. 하지 않아야 하는 것투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사랑은 금기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행동과 포용입니다. 금기들을 스스로 제어함으로써 사랑받는 사람이 자유를 느끼는 것, 그것이야말로 온전한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성서』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경전은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종교심을 키우기 위해 경전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양을 키우기 위해 각 종교의 경전을 읽기를 권하기도 합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거기에 더해 사랑을 위해 중요한 종교의 경전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세상이 사랑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종교의 경전은 조금 부담스럽다고요. 그렇다면 괴테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최고의 것”이라고 찬사했고, 위대한 소설가이자 시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모든 문학의 절정”이라고 추켜세웠던 고전古典,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을 읽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영혼의 아버지로 존경했던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영원의 세계를 순례하는 단테, 그 앞에 형상화된 것은 순수와 환희로 빛나는 ‘사랑’입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 즉 선과 악의 문제, 죄와 벌의 문제, 정치와 종교의 문제 등등은 결국 하나의 진리를 통해서만 해결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단테에게 그 진리는 ‘사랑’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지고자至高者의 노래’ 또는 ‘가르침’이라는 뜻의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 수록된 『바가바드기타』는 어떠신지요. 깊은 철학과 영성을 담고 있지만 스승 크리슈나와 전사 아르주나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이 땅에서 어떤 행복을 맛보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가바드기타』에 “모든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나는 길, 그 길에 이르는 지혜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고 즐겁게 실천할 수 있으며 직접 체험할 수 있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누구나 쉽게 알아듣고, 즐겁게 실천하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것. 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 결과가 아닌 과정
사랑은 위대합니다. 그것이 잉태한 수많은 삶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은 숭고합니다. 때로는 위태로운 사랑과 편협한 사랑이 우리를 두려움으로 몰아넣기도 하지만, 사랑 자체는 흠이 없고 완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 그 자체로는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사랑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수많은 시간과 공을 들일 뿐 아니라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진정하고 온전한 사랑의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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